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시위대, 동국대학교 학생들 선두로 경무대 향해 전진

  • 공유하기
오전 11시가 좀 지나면서 시위를 시작한 동국대학교 학생 약 2천 명은 을지로를 통과하여 미국대사관(현 서울시청 을지로 청사. 당시엔 미문화원, 또는 미공보원이라고도 하였음) 앞, 시청 앞을 거쳐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하였다.『 동대시보』1960. 4. 30 1면 ; 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동국 건아의 민주기록」, 이강현 편, 133-153쪽.
동국대학교 학생대표 11명은 4월 5일과 10일 모여 반정부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전교생이 참석하는 총장의 문화사 강의일인 4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했으나 일정의 변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46-147쪽).
이들은 이미 이곳에 학생들이 많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계속 전진, 세종로 거리를 북상하였다. 이들이 5대의 소방차와 무장경관의 제지를 무릅쓰고 중앙청중앙청은 현 광화문 자리에 위치했던 건물이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1916년부터 건립을 시작해 1926년 완공한 조선총독부 청사로 해방 이후에도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광화문을 소격동을 바라보는 궁의 동쪽으로 옮기고, 그자리에 중앙청을 세워 경복궁을 완전히 가렸다. 해방 후에 미군이 이 건물을 군정청으로 사용하면서‘중앙청’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제1공화국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이후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중요 정부부처 청사로 사용되다가 1986년 8월부터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완전해체를 결정하여 현재는 건물의 돔 부분만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앞을 지나 경무대(현 청와대) 쪽으로 향하자,동국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133-143쪽.
이날 동국대 시위에 참가했던 김칠봉은 국회의사당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포진하고 있어“동국대는 경무대로!”라고 외쳤고, 그 말에 시위대는 경무대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김칠봉 인터뷰, 2010. 4. 8).
뒤이어 의사당 앞에 도착한 서울대 사대와 의대, 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교에서 나온 1만여 명의 학생들이그 뒤를 따랐다.『 대학신문』1960. 5. 2 2면 ; 조화영편, 92쪽 ; 이영민, 「강문고등학교 :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사월혁명청사편찬회, 『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526-528쪽동국대 시위대는 경무대로 향한 행렬의 제일 선두가 되었다.
강문고등학교강문고등학교는 현 용문고등학교이다. 학생들의 선언문과 구호 금번 우리 강문의 2천 학도들은 3·15부정선거와 박탈된 민권 및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총 봉기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학원에 자유를 주며 정치 도구화 하지 말 것
2. 3·15선거는 부정선거이므로 다시 할 것
3.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엄중 처단할 것
4. 공무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며, 경찰은 중립을 지킬 것
5. 헌법에 보장된 민권을 박탈하지 말 것

구호
1. 학원에 자유를 달라
2. 3·15선거 다시 하자
3. 부정선거 원흉들을 즉시 처단하라
4.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5. 이 정권 물러가고, 경찰정치 중단하라
6. 마산사건의 책임을 져라
7. 악질 경찰을 즉시 처벌하라
출처 :「강문중고」, 사월혁명청사편찬회,『민주한국 사월혁명청사』, 성공사, 1960, 525-526쪽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구호를 부르며 세종로를 거쳐 중앙청 앞을 돌아경무대 쪽으로 전진하였는데, 그 물결은 끝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시위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중앙청 정문을 지나 해무청(海務廳)해무청은 현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중앙청을 바라보며 서있던 건물에 있었다. 상공부 장관 소속의 외국(外局)으로, 1955년 2월에 신설되었다. 수산ㆍ해양 경비ㆍ조선(造船)ㆍ항만 공사에 관한 사무와 일반항만 및 해운 행정을 맡아보았으나 1961년 해체되고, 그 업무는 농수산부ㆍ교통부 등으로 이관되었다. 현재는 해양수산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앞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12시 5분 경, 선발대인 동국대 학생들이 중앙청 후문인 통의동 파출소 앞에 이르자 중앙청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대가 일제히 최루탄을 발사하였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 이순권, 「동국대학교」, 사월혁명청사편찬회, 512-513쪽.
일부 기록에는 오전 11시 55분 경 해무청에서 최루탄이 발사되었고, 학생들이 “최루탄 쏜 놈을 잡아라!”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비로소 본격적인 총포를 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85쪽).
총성이 잠시 멈추자 이번에는 빨간 물결이 일직선으로 하늘에 솟아올랐다. 대기하고 있던 소방차의 소방호스가 빨간색 염색물을 내뿜은 것이다. 콩 튀듯 하는 공포와 최루탄 세례, 물세례를 받은 시위대는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날아드는 공포에 학생 한명이 복부에 부상을 입고 학생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운반되었다.『조선일보』1960. 4. 19 석1·3면 ;『동아일보』1960. 4.20 조3면, 석3면.
같은 지역 같은 시간대의 기사에서 조선일보에는 부상을 입은 학생이 “홍익대 학생이라고 함”이라 하고, 학생들의 부축을 받고 서울대학 병원으로 운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에는 동국대생 1명이 부상을 입었고, 근처 이태리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들이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시위대는 “죽여라!”, “데모대를 살인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경찰대를 향해 돌을 던지며 맞섰지만 경찰의 첫번째 바리케이드에 막혀 그대로 주저앉았다.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85쪽.
마침 중앙청 앞에서 해무청으로 뚫린 길에는 상하수도공사를 하느라고 도로주변에 돌이 많았다 한다(이순권,513쪽).
경찰과 20미터의 거리를 둔 1천 명 가량의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고 외쳤다.『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해무청앞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외국인 아파트에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이효식, 744쪽 ; 이순권, 513-514쪽
분류
시위 상황 / 서울 19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