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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로 모인 시위대, 계엄군과 조우

탈취한 차량 30여 대에 분승한 시위대는 약 40자루의 소총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맨주먹이었던 시위대는 마치 소규모의 무장기동대화한 장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밤 10시 경, 시가 동쪽으로 행진하던 이들은 라이트와 사이렌을 총동원하고 탱크를 앞세워 서울로 들어오는 계엄군 1개 연대 병력을 보고 도주하였다.육군본부의 기록에 의하면 군대가 서울로 진주할 때 이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공포를 쏘면서 들어올 것인가, 사이렌을 울리며 들어올 것인가를 논의한 끝에 사이렌을 울리기로 결정하였다 한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43-44쪽). 만약 이때 군이 공포를 쏘면서 진군했다면 군에대한 시민들의 감정은 퍽 나빠졌을것이다. 의정부 쪽으로 도주한 시위대는 밤을 새운 숨바꼭질 끝에 산등을 넘어 고려대 쪽으로 향하였고, 일부는 정릉 산 속으로 몰려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뚝섬방면으로 떼를 지어 나갔다.
진로를 잃은 시위대 약 1천 명이 고려대 강당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한 계엄군은 고려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마이크를 통해 빨리 나오라는 선무공작을 했다. 그러나 투항하는 사람은 없었다.『고대신보』, 1960. 5. 3 2면 ;『조선일보』1960. 4. 20 조1면, 석3면 ;『동아일보』1960. 4. 20 조1·3면, 석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5쪽. 고려대로 들어간 시위대 숫자에 대해 조선일보에서는 “약 1,200여 명”, 연행자 숫자는 “40여 명”이라고 보도하였으며(『조선일보』1960. 4. 20 조1면), 육군본부 기록에는 “1,500명 이상”으로 되어있다(육군본부군사감실편, 39쪽).
4월 25일 교수시위 주도자 중 하나인 이상은 교수는 이튿날 나가보았더니 시위군중이 하룻밤을 세운 고려대 강당(서관교사)는 유리창 하나 파손되지않았다고 한다(이상은, 「교수단 데모에 이르기까지」, 이강현 편, 205쪽).
고려대 정문에 탱크를 배치하고 이들을 막고 있던 군대는 문 안을 향하여 “그대들은 폭도가 아니며, 또한 군은 그대들을 체포하거나 총을 쏠 의사가 전혀 없으니 대표를 골라 타협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의는 잠시 후 응낙되어 사단장과 특무부대장, 그리고 사단 전속 부관, 이렇게 세 사람만이 호신용 권총 하나만을 가지고 고려대 안으로 들어갔다.
회담 장소에 들어선 조재미 사단장은 그곳에서 시위대원들이 메고 다니다가 이곳에 안치한 것으로 추측되는 태극기로 덮은 시신을 발견하고는 철모를 벗고 경건한 조의를 표하였다. 이 광경을 본 시위대원들은 눈물을 흘렸고,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 사단장은 이들에게 이 중 4명의 대표들이 고위 당국자들과 만나 그들의 요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알선하여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시위대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무장해제와 해산에 동의하였다.조화영 편, 329-330쪽.
이 당시는 군대와 시위대와의 관계가 아직 명확한 하나의 선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고, 군으로서는 시위대가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39쪽).

시위대 대표들을 데리고 사단본부로 돌아온 사단장은 그들을 대기시켜놓고 상부와 절충 끝에 중앙청으로 국무위원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정렬 국방장관은 경무대 방문으로 부재중이었고, 다른 장관들은 “폭도를 어떻게 만나느냐”고 하며 사단장과의 면접조차 거부하였다. 체면을 잃고 사단본부로 돌아온 조 사단장은 이 내용을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로 보고하였다. 사령관 측은 즉석에서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부녀자를 우선적으로 석방시키고, 학생으로 신분이 확인된 자들도 무조건 석방시키라고 하였다. 단, 방화와 살인 등을 한 자들은 연행할 것이며, 학생대표 면담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조치하겠다고 지시하였다.
날이 밝자 계엄군은 그 포위망을 압축하여 강당에서 농성 중이던 시위군중 중 무기를 가진 자 30여 명을 연행하고, 나머지는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연락장교 이석봉 준장의 지프차는 실망한 시위대에 의해 모두 파손 당하였다.육군본부군사감실 편, 39-40쪽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05쪽
동아일보 발표 4월 19일 사상자 명단 〈사망자〉
•손중근(23, 서울대 사대 국문과 3년) •17세가량의 소년(순화병원)
•서대문 이기붕 집 앞 2명 즉사 •태평로파출소 앞 2명 즉사

〈부상자〉
순화병원
•나용주(홍익대 미술과) •박원배(연세대 정외과 4년생) •전대길(동국대 2년생 타박상)
•이동인(동국대 법과 2년생 넓적다리 관통상) •고영수(22, 서울대 미대 2년생 파편찰과상)
•이회백(27, 서울대 의대 4년생 다리관통상) •박장엽(연세대 의대 4년생 총상)
•김정만(동성고 3년생 총상)
세브란스병원
•김재덕(21, 서울대 사대) •양병옥(16, 관철동 246) •기영린(20, 강문고)
•임화연(19, 대경상고) •박광일(19, 금곡동 265) •김신운(20, 여, 서울대 사대)
•박홍규(21, 동국대생) •박원대(21, 성신대생)
수도의대 제2병원
•이용준(건국대 3년생, 다리총상) •오광식(18, 흥국고 2년생, 다리총상)
외 •이진면(29세, 아현동 85-39, 왼쪽 넓적다리 관통)
출처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동아일보 발표 4월 19일 파괴·소실된 건물과 탈취·파괴된 차량 건물피해
전소 : •반공회관 반공청년단 본부 •서울신문사 •태평로파출소 •정릉파출소
•돈암동파출소 •안암동파출소 •종로5가파출소 이상 7곳
일부 파괴 : •세종로파출소 •부흥부 •문교부 •외자청 •자유당 중앙당부
•적선동파출소 •광화문파출소 •중부소방서 이상 8곳

차량피해
•경찰백차 1대 •소방지프차 및 소방차 7대 •군용 트럭 1대 •민간 트럭 1대
•군용 지프차 4대 •서울신문사 차 4대 •연합신문사 차 1대 •세계일보사 차 1대
•기타 파괴 및 소실 3대 등 이상 23대
출처 :『동아일보』1960. 4. 20 석3면
조선일보 발표 4월 19일 피해 건물과 차량 전소된 건물(14)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통인동파출소 •태평로파출소 •용두동파출소
•고사(高砂)파출소 •동묘파출소 •북선동파출소 •종암파출소 •정릉파출소
•돈암동파출소 •안암동파출소 •종로5가 파출소 •신설동파출소

일부 파괴된 것(16)
•원남파출소 •종로2가파출소 •을지로1가 파출소 •을지로3가 파출소
•을지로6가 파출소 •남선파출소 •서선파출소 •성북동파출소 •광화문파출소
•적선동파출소 •중부소방서 •정릉2동 동회 •자유당 중앙당부 •문교부 •부흥부
•외자청

차량피해(22대)
•경찰 백차 1대 •소방차 7대 •군용트럭 1대 •군용 지프차 4대 •서울신문사 차량 4대
•연합신문사 차량 1대 •세계일보사 차량 1대 •기타 파괴 및 소실 3대
출처 :『조선일보』1960 4. 20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