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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고 비롯, 시내 학생 거의 합세

1오후 1시 20분, 200명가량의 광주여고생들도 교사의 제지를 무릅쓰고 시내로 몰려 나와“학원에자유를달라!”,“ 평화적인데모를방해하지말라!”고 외쳤다. 광주고학생들도 연행된 학생들이 풀려나자 이를 계기로 전교생이 총궐기하여 스크럼을 짜고 학도호국단가를 부르며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광주고등학교 시위대에 대하여 일부 기록에는“약 1,500명”(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49쪽), 또 다른 기록에는“1천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임인수, 258쪽). 이들은 때마침 도청 앞으로 향하여 달려오던 약 500명의 광주공고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금남로1가와 4가에서 소방차를 동원한 경찰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곤봉으로 여학생들에게 폭행을 가하였고, 학생들은 물을 뿌리는 소방차에 돌을 던져 차체 일부를 부셔버렸다.『전남일보』1960. 4. 19 1면 ; 김재희편, 143-144쪽 ; 임인수, 257쪽.
오후 1시 50분 경, 500여 명의 광주상고 학생들도 1천여 명의 광주고 학생들과 합류하여 금남로 2가에서 달려드는 경찰 쓰리쿼터와 백차를 때려 부셨다. 광주고, 조선대 부속고등학교(이하 조대부고), 광주공고, 광주상고, 광주여고 등은 학교별로 시위대열을 이루었고, 광주일고, 사레지오고등학교,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56-158쪽 이때부터 충장로파출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곤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금남로 일대는 조대부고 학생들과 300명가량의 숭일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가득 차게 되었다.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위대는 서중으로 향하였다. 서중학교(광주일고) 교정의 ‘광주학생 독립기념탑’앞으로 모인 시위대는“광주학생 만세!”를 3창한 뒤 되돌아 충장로 길로 올라갔다.『 전남일보』1960. 4. 24 3면, 1960. 4. 23 ; 김재희 편, 144-145쪽시위대원 수는 이미 5천 명을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임인수, 258-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