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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학교, 광주 학생시위에 불을 지피다

19일 오전 10시 40분 경부터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주고등학교 학생 약 500명이 수업을 중지하고 운동장으로 나와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감행할 기세를 보이자 급거 출동한 경찰기동대와 교장의 무마로 운동장에서 실랑이를 하였다.『전남일보』1960. 4. 19 1면 ; 임인수, 「나는 4·19 광주사건을 증언한다」, 조화영 편, 255쪽.
광주고 학생들은 3월부터 전국에서 일어나는 학생시위에 자극받아 여러 차례 시위를 모의하였으나 무산되었다가 언론을 통해 4월 18일 고대시위를 접한 이후 광주고 학생들이 모여서 밀의를 하고 광주 학생시위의 선봉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이들은 구호를 정하고 다음날인 19일 아침 운동장에 모이기로 하였다(김재희편, 「광주 4·19학생의거 전모」,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139-140쪽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58쪽).
이런 가운데 약 80명의 상급생들이 동쪽 판자문을 넘어뜨리고 뛰쳐나갔다.다른 기록에는 “200여 명”으로 되어있다(『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전남일보』1960. 4. 19 1면).이중 50명은 시내로, 30명은 경양방죽(지금은 없어진 옛 광주시청 부근 일대) 쪽으로 나가면서 “3·15선거는 무효다”,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양방죽 쪽으로 나간 학생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연행되어 주먹세례를 받았다.임인수, 255쪽 ; 4·19혁명부상자회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편찬위원회, 159-160쪽 시내로 나간 학생들은 중앙국민학교 후문에서 백차 7대로 급거 출동한 경찰관들과 맞닥뜨렸다. 경찰들은 곤봉으로 시위 학생들을 무차별 강타하여 유혈소동을 일으켰다. 경찰제지에 의해 산발적으로 해산된 시위대 10여 명은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여자고등학교, 광주공업고등학교 앞으로 달려가며 “일고생들이여! 광주고가 일어났다. 때를 놓치지 말고 나오라!”,김재희 편, 140-142쪽 ; 『조선일보』1960. 4. 19 석3면 ; 『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광주일고는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약칭이다. 일제시기 광주서공립중학교가 1951년 광주서중학교(서중)로 개명되었고, 학제변경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누어짐에 따라 1953년 광주제일고등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았다. 서중은 1972년 중학교 평준화로 폐교되고 광주제일고만 남게 되었다(광주제일고 홈페이지 학교연혁 참조http://www.ilgo.hs.kr/). 따라서 1960년 당시에는 같은 교내에 서중과 일고가 모두 있었다. 광주일고는 이날 편입시험이 있어 1, 2학년은 이미 하교하였고, 3학년들은 교사들의 감시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60쪽).
“전남여고생들 나오라!”, “공고생이여 나오라!”고 외쳤다.『 전남일보』1960. 4. 23 3면이 일로 학생 수 십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연행된 학생 수는 기록마다 모두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동아일보에는 연행된 학생이 60명으로 되어있으나(『동아일보』1960. 4. 20 조3면), 일부 기록에는 30명으로 되어있고(임인수, 257쪽), 또 다른 기록에는 48명으로 되어 있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59쪽 ; 김재희 편, 143쪽 ; 『전남일보』1960. 4. 19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