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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도 아랑곳 없이 광주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한편 이날 밤 7시 넘어서부터 역전 광장에서는 일찍 저녁을 먹고 나온 학생들에 의해서 새로운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이 시위대에는 나이 어린 사레지오중학교 학생들도 끼어 있었고 그 밖에 광주농고 및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들은 금남로로 솟아 올라오면서 경찰서를 습격하려다가 학동으로 빠져나가 학동파출소에 투석하였다. 그 순간 총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한 소년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광주 4·19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이 소년은 후에 강정섭으로 밝혀졌는데, 전남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강정섭의 신원은 4월8일에 가서야 밝혀졌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30년사 편찬위원회, 173·190쪽). 오후 8시 30분 경, 시위대는 학동파출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어 양림동파출소를 습격하였다. 양림동파출소를 파괴한 다음 시위대는 둘로 나뉘어져 일대는 서방지서로 향하다가 흩어지고 다른 일대는 도심지로 되돌아와서 도청 앞을 거쳐 호남신문사 앞길로 머리를 돌렸다. 다른 시위대열 또한 충장로와 금남로 부근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계림동파출소를 습격하고 금남로를 통과하여 특무대 앞에 이른 시위대열과 조우하였다. 어디선가 “특무대를 부수자”는 소리가 나오자 “와!”하고 특무대를 포위할 무렵 부고생 한 명이 “군대는 손대지 말라! 군대는 우리 편이다”하고 외쳤다.
한편, 광주여관 앞과 전남일보사 인사관 앞은 시위대로 빽빽이 들어찼으며 수효는 어느새 1만 여 명을 헤아렸다.김재희 편, 152-154쪽.시위대는 광주호텔 앞에서 지방경찰서에서 응원 나온 경찰들과 약 40분 동안 치열한 석전을 전개하고, 호남신문사에도 “자유당 앞잡이”라는 욕설과 함께 투석하였다.임인수, 261쪽.
동아일보는 학생 외에도 많은 청년들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0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