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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경찰서 앞에서 시위대에 실탄 발사, 사상자 발생

오후 9시 경, 점차 숫자가 불어난 시위대광주경찰서로 향하였다. “폭력경찰 때려 죽여라!”, “민주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등을 외쳤다. 시위대광주경찰서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 앞에서 “광주 학생의 피는 끊고 있다!”, “몽둥이 경찰 죽여라!”, “선량한 민주의 사도, 연행 학생 즉시 석방하라!”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최루탄공포탄으로 제지하였다.『전남일보』1960. 4. 28 3면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6-187쪽학생들과 경찰 사이에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40명으로 구성된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서 “돌격이다!”하고 고함을 지르며 마치 적진에 몰입하는 것처럼 총격을 가하며 도로의 양편으로 갈리어서 시위대 앞으로 육박해 왔다.일부 기록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9시 40분 경에 이루어졌다고 한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9쪽). 시위대는 “무기를 빼앗아라!”고 외쳤으나 빗발같이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계속 발사하는 바람에 시위대는 일제히 도망쳤다. 경찰은 도망하는 시위대를 추격하여 계속 사격을 가했다. YMCA 앞에서 특무대 앞에 이르기까지의 일대에는 총탄을 맞고 쓰러진 학생들이 100여 명에 달했다. 그래도 경찰은 사격을 멈추지 않고 마치 소탕전을 전개하듯 무질서한 총격을 해댔다. 이윽고 총소리가 멈추자 사복경관들이 나와서 아직 달아나지 못한 시위대원을 잡아내기 위해 집집을 수색했다. 이들은 학생들이 잡히는 족족 끌고 나와서 곤봉으로 내리치고손을 비틀었으며, 길가에 그대로 쓰러져 있는 시체나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 부상자를 구둣발로 찼다.
이날 밤 약 300명이 수색에 의해서 붙들렸는데, 이들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연행되었다.김재희 편, 155-156쪽 ; 『전남일보』1960. 4. 30 3면 광주경찰서를 포위한 학생들에게 발사한 총탄으로 광주서중 3학년 학생이 심장관통으로 즉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상당수의 학생과 시민들이 총상을 입었고, 학생 3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전남일보』1960. 4. 29 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0쪽 ; 임인수, 261-262쪽
오후 10시 반까지도 광주법원 앞 광장에서는 농성이 계속되었고, 총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동아일보』1960. 4. 20 석3면 이 날 민간인과 경찰을 포함,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사망자와 부상자의 숫자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였지만 사망자 중 학생은 1명도 없다.
전남일보는 광주지구 계엄사무소 발표를 기사화하였는데, “사망 8명, 부상 59명”으로 발표하였다(『전남일보』1960. 4. 23 1면). 다른 기록에는 “계엄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이날 광주시내에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쓰러진 사망자는 민간인 사망 6명(그 후 3명 더 추가), 부상자 25명, 경관 사망 1명, 부상 21명”으로 기록하였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0-151쪽), 또 다른 기록에는 사상자의 명단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사망자 7명, 부상자 74명의 명단이 실려있다(김재희 편, 159-161쪽).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기록에는 경찰을 포함, 사망자 9명(총상 8명)의 명단과 『청춘의 혈』(김재희 현)에 나와 있는 부상자 명단을 인용하고 있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78-182쪽 ; 김재희편, 159-161쪽).
1960년 6월 3일 당시 재판공소장(광주지검 형 2031호)에 기록된 부상자는 모두 13명이다.
광주 4·19 사망자 및 부상자 명단 사망자
•고중석(남 16, 무직, 계림동 2구 28방) •김재복(남 18, 무직, 서동 1방) •이귀봉(남 19, 속성학원생, 진도군 고금면 고성리 •강정섭(남 17, 노동, 백운동 32방) •박순희(여 21, 양제직공, 금동 216) •장기수(남 18, 속성학원생, 금남로 5가 294) •김준호(남 19, 목공, 양동 1구 39방)•최금동(남 29, 경찰관, 경찰의 사격으로 사망) •강정섭(학동파출소 습격시 사망) 이상 9명
부상자
•오권식(남 12, 학생, 충장로 4가 30) •류윤성(남 12, 학생, 충장로 1가 32) •강영원(남 18, 학생, 대인동 12방 57) •황영운(남 13, 학생, 구동 47의 4) •김성수(남 13 학생, 류동 70)•이혜택(남 18, 학생, 계림동 49) •이정근(남 38, 도의원, 계림동 1구 483) •박청석(남 20, 학생, 학동 1구 28방) •김서운례(여 51, 무, 금남로 4가) •박해룡(남 20, 무, 대인동 23) •박자용(남 27, 무, 서석동 6) •강주형(여 25, 무, 양림동 6) •김숙(여 19, 무, 림동 12) •박종대(남 17, 학생, 계림동 1구 904) •최영자(여 19, 학생, 학동 1구 14방) •이준희(남 22, 학생, 학동 2구, 841) •정삼선(남 20, 학생, 학동 2구 11방) •이해학(남 18, 학생, 남원읍 중남리) •박노필(남 18, 학생, 남동 116) •김동현(남 18, 학생, 북동 242) •김영진(남 16, 점원, 충장로 5가) •이행송(남 18, 무, 북동 89) •차귀환(남 26, 학생, 충장로 5가) •박천조(남22, 학생, 산수동 14방) •황인도(남 15, 학생, 월산동 13방) •송태홍(남 22, 학생, 등용동 대우리) •박래주(남 21, 학생, 구동 15) •박형근(남 48, 무, 학동 2구) •김녹영(남 40, 무, 대의동) •임춘성(남 32, 무, 충금동) •민란식(여 31, 무, 계림동 1구) •박경태(남 21, 무, 서호동 10방) •박정용(남 38, 상업, 담양군 무정면 동산리) •이인주(여 15, 무, 금동 22방) •곽만철(남 20, 직공, 백운동 31방) •서윤태(남 19, 이발사, 서동 11) •소청일(남 18, 무, 황금동 23) •김재덕(남 19, 이발사, 서동 11) •유기학(남 16, 학생, 류동 13방) •김관균(남 17, 학생, 동명동 154의 10) •김두현(남 18, 무, 서석동 14방) •정우하(남 18, 학생, 누문동 56)•신영섭(남 19, 학생, 림동 91) •고몽우(남 47, 무, 송정읍) •고선주(남 48, 무, 송석동 석정리) •성홍기(남 51, 무, 방림동) •고병옥(여 22, 무, 남금동 216) •임춘철(남 13, 학생, 동명동 2구 12방) •고홍소(남 19, 학생, 효죽동 31방) •한성기(남 44, 노동, 계림동 1구 50방)•정극로(남 19, 학생, 상무동 12방) •조경호(남 17, 학생, 학동 1구 15방) •이묘순(여 13, 학생, 동명동 6방) •오교풍(남 14, 무, 충금동 13방) •황주영(남 18, 무, 양동 1구 26방) •최세영(남 19, 학생, 산수동 24방) •유상임(여 18, 학생, 방림동 5방) •강용원(남 21, 학생, 계림동 1구 536) •박래현(남 19, 학생, 양동 1구 29방) •안상은(남 31, 무, 방림동 7방) •김호준(남 27, 노동, 효죽동 11방) •김의형(남 17, 학생, 계림동 1구 12방) •김영숙(여 19, 무, 계림 2구 664) •모수일(남 17, 학생, 림동 23방) •서운학(남 21, 학생, 동명동 2구 8방) •김도암(남 19, 학생, 동명동 5방) •박귀철(남 21, 무, 서동 8방) •박유성(남 21, 무, 동명동 1구 27방) •한경호(남 27, 무, 대인동 265) •이해경(여 17, 학생, 서동 7방) •송기영(남 15, 학생, 양동 1구 6방) •정담양(남 27, 무, 방림동 13방) •이길홍(남, 학생, 학동 1구 27방) 이상 74명
출처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178-182쪽 ; 김재희 편,「광주 4·19 학생의거 전모」,『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59-161쪽이 두 가지 기록에는 인명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내용이 좀 더 상세한 『호남 4·1930년사』의 기록을 따랐다.
또한 광주경찰서를 비롯하여 7개 파출소의 집기와 유리창 등이 파괴되었고 소방차 1대와 경찰 백차 1대, 쓰리쿼터 1대도 파손되었다. 이 외에도 서울신문사 지국과 기타 몇몇 공무원 집도 투석으로 피해를 보았다.『전남일보』1960. 4. 22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