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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학생들, 서울 시위 소식 듣고 시위전개

19일 오후 3시, 대구에서는 18일 서울에서의 고려대 시위와 19일 오전 서울에서의 대대적인 대학생 시위소식을 접한 경북대학교 5개 단과대학 학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다.『경북대학보』1960. 4. 27 1면 ;『대구매일』1960. 4. 20 1면. 조선일보에는 시위대원의 숫자가 삭제되어있다(『조선일보』1960. 4. 20 조3면). 이들은 오후 1시 경 부터 산발적인 회의를 계속하며 오후 2시 반에 시위할 것을 합의, 결의문을 작성하고 구호를 채택하였다.
대운동장에 모인 2천여 명의 학생들은 결의문이 낭독되자 애국가와 교가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군가를 부르며 대구역전, 중앙동, 남문시장, 도청을 거치며 “억지폭력 독재정치를 물리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10분 후, 경북대와 대구공업고등학교 입구에서 시위대를 발견한 경찰은 신암파출소 앞에 트럭 한 대를 세워 길을 가로막고 무장경찰관 50여 명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학생대표와 경찰 측의 타협으로 도청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행진하였다. 역시 대구역전과 한국은행 대구지점에서도 트럭에 실려 온 경찰들이 대기 중이었으나 시위대는 도청 방향을 피해 중앙통을 거쳐 남문시장으로 향하였다.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결의문일부 기록에는 경북대 학생들의 결의문을 ①구속 중인 우리의 학도 동지를 즉시 석방할 것, ②마산사건에 대한 상세한 해명과 동족 살해에 대한 엄중한 책임 소재를 밝힐 것, ③악독한 고문과 구타를 감행한 경찰로 공인된 자를 속히 구속 처단할 것, ④헌법이 보장하는국민의 기본 권리를 장해하는 법률을무효화 시킬 것으로 기록하였다(조화영 편, 239-241쪽). 1. 마산사건으로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
2. 부정선거 다시 하라
3. 합법적 데모에 간섭 말라

구호
一. 부정선거 다시 하자
一. 마산학생 사건 규명하라
一. 폭행경찰관 물러가라
一. 3인조·9인조 반대한다
一. 학생은 살아있다, 시민은 안심하라
출처 :『경북대학보』1960. 4. 27 1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61쪽
오후 4시 45분 경, 시위대는 “정부는 마산사건을 책임지라”, “민권의 체면을 망치지 말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남문시장을 돌았다. 이곳에서는 “구대(大邱大)는 무엇하나?”, “구대(大邱大)는 합류하라!”고 외쳤다. 도청 정문 앞 광장에서는 경찰과 약간의 옥신각신 끝에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지사 나오라”, “마이크를 내놓아라”고 고함을 치면서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오후 5시 10분, 고병헌 경북대 총장과 이효상 문리대 학장 등 학교 책임자와 정·사복경찰관이 둘러선 가운데 오임근 도지사가 나와 “이성을 잃지 말아주기 바란다. 지금 5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질서정연한 시위를 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그는 “3인조·9인조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답하였다. 이어 마산사건 고문경찰관에 대한 조치를 묻는 질문에는 “권한 밖의 일”이라고 말하였다.
오후 5시 25분 경, 학생들은 “마산에서 경찰에 구금된 학생들은 대검(大檢) 총장의 지시로 전부 석방되었다”는 총장의 답변을 듣고 광장을 떠나 시가행진을 하고 헤어졌다.조선일보는 대구의 시위를 타 지역의유혈시위와 비교하여 “평화로운 시위”로 명명하였다(『조선일보』1960. 4.20 조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