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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위대, 무장군인과 투석전

4월 20일 광주 시내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진주하였다. 각 학교는 휴교 상태였으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은 이날 오전 10시 경 200여 명이 집결했다가 교직원과 경찰들의 제지에 의해 해산되었다. 같은 시각, 전남대학교 입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모이자 광주농고 학생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학생들은 혈서로 쓴 “협잡(挾雜)선거 다시 하여 민주대한 이룩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스크럼을 짜고 광주역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다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시위대는 5천 명을 헤아렸다.김재희 편, 「광주 4·19 학생의거 전모」, 『청춘의혈 :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156쪽 ;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82쪽
헌병과 경찰로 혼성된 백차부대는 걸어오는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무수히 발사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군대는 학생을 옹호하라!”“살인 경찰 잡아 죽이자!”고 구호를 외치며 전진했다. 시위대가 강한 제지를 무릅쓰고 역전통을 지나 선두가 충장로4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군인이 탄 GMC 트럭 10대가 대열을 막아섰다. 시위대는 군인들의 제지로 전진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시위대가 재집결을 시도할 때마다 장갑차가 돌격해 막아섰다. 또 광주 상공에는 군대의 정찰기(L19기)가 시위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지상에 무전으로 연락하였다.『전남일보』1960. 4. 20 석3면
시위대 일부는 충장로1가로 진출하였고, 다른 대열은 금남로1가를 거쳐 지산동으로 달아났다. 충장로1가로 진출한 시위대가 충장로2가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특무대 쪽에서 달려온 약 2개 소대의 군대가 대열의 뒤를 쫓았다. 군대가 시가로 들어오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군대는 우체국 앞에서 천천히 사직공원 쪽으로 빠지던 시위대 후미와 충돌했다. 학생들은 우체국 주변의 상점으로 피신했다. 우체국과 산업은행 사이 잡화상 지붕 위로 올라간 학생들은 벽돌과 기왓장을 뜯어 길가에 던졌다. 군인들은 처음에는 직접 대결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 대위 하나가 계속해서 기와를 뜯어 내리는 학생을 보고 “내려오라”며 쫓아가자 그 학생은 벽돌은 든 채 뛰어내리면서 그 군인의 전면 좌측 두부를 쳐서 거꾸러뜨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본 군인들은 곧 흥분하여 위협사격을 했다. 학생들은 총성을 듣자 건물 안으로 완전히 숨어버렸고, 군인들은 건물 속에 들어간 학생들을 포위하여 잡아내기 시작했다. 사복 경찰관들은 잡혀 나온 학생들을 군인의 손에서 인계 받아 닥치는 대로 주먹, 발, 몽둥이로 후려갈겨 경찰서로 연행하였다.김재희 편, 157-158쪽 시위대가 해산한 뒤 광주 시내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경비를 섰다.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89쪽 ;『전남일보』1960. 4. 20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