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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학교, 서울 시위에 자극받아 시위전개

18·19일 양일간에 걸친 수도 서울에서의 소요에 자극받은 전주 학생들도 20일 오전 9시를 전후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전북대학교 덕진동캠퍼스 학생 약 500명은『조선일보』는 3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조선일보』1960. 4. 20 석3면).학교당국이 19일 밤 전국에 내려진 문교부의 휴교령으로 당분간 휴교케 되었으니 집에 돌아가라고 하자 일제히 교문을 나오면서 우발적으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학교 앞 철길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는데, 학교로부터 약 1킬로미터 지점인 시내 검암동 삼거리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사복 무장경찰관 약 200명과 마주치자 만세를 부르면서 충돌하였다. 학생들은 경찰과 실랑이를 하면서도 철로와 좁은 골목길을 타고 시내로 돌입, 고사동 시민극장 근방에서 일대 수라장을 일으켰다. 이때가 오전 10시 20분, 전주 경찰서 김원용 서장은 경비경찰관에 바리케이드를 치도록 명하고 몰려오는 학생들에게 발포하겠다고 위협하자 학생들은 뒤로 주춤하면서 귀가의 자유까지 억압하느냐고 소리쳤다. 김 서장은 학생 하나에 경찰 1명이 맡아 차에 싣고 연행하라 명하여 학생들은 경찰에 의하여 버스 2대에 강제로 실려 연행되었다. 이 일로 약 30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오전 11시 경, 시위대는 해산하였다.『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한편 오전 9시 20분 경, 전주공업고등학교 학생 약 100여 명도 고사동 전매청 앞에서부터 스크럼을 짜고 시위하였다.『 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 고광준, 「4월의 전북 학생데모사건을 증언한다 : 취재기자가 훑어본 밑바닥」, 조화영 편,『 사월혁명투쟁사 :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3-275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1쪽 ;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 『한국일보』1960. 4. 20 조4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사울혁명 :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52쪽 이들은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 “우리의 주권을 찾자”, “협잡선거 물리쳐라”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중앙동 일대를 행진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많은 무리가 이에 합세하여 도청 앞·민주당 도당 사무소앞·남문통·전주 역전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통일행진곡을 부르면서 주먹을 휘둘러 “전주 시민이여 궐기하라!”고 외칠 때 마다 가두의 시민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긴 했지만 합세하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역전 거리에서 2중 3중으로 방어진을 치고 있던 무장경찰관과 소방차의 제지를 받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30여 명이 연행되었다.고광준, 273-275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1쪽 ;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 『한국일보』1960. 4. 20 조4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2쪽
정오 경, 시내 중앙통과 역전통은 오전에 이어 학생들을 포함한 시민들로 혼잡이 계속되었다. 역전 5거리에서 학생 시위대를 제지한 소방차를 위시로 한 경찰기동대의 주력은 시청 옆에 포진하였다. 전북공보관과 시청 앞에는 비좁을 정도로 시민들과 경비경찰관이 모여 있었다. 시위는 도 공보관 앞에서 제지되었지만 산발적인 시위는 밤 9시까지 잇달았다.『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