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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학생들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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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8시 40분 경부터 이리(현 익산) 남성중고등학교학생 약 300명이 시위를 감행하였다.『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이들은 이리농업고등학교를 통과, 교육구청과 시청 앞에서 농성하고, 역전 광장에서 집결한 다음 경찰서 앞에서 연좌하였다. 학교장과 경찰서장, 그리고 학생 대표들과의 회합에서 시위대는 학원의 자유를 주고 쉬지 말고 공부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여 학교장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들의 시위가 일단락될 무렵인 오전 9시 30분 경, 15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북대 이리캠퍼스의 농대와 공대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또다른시위를 전개하였다.조선일보에는 약 3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일보』1960. 4. 21 조3면).이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공부를 시켜달라”, “학교는 정치의 이용물이 아니다”, “계엄령을 철폐하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구(舊)시장 쪽으로부터 달려와 남성중·고 학생들과 합세하여 역전에 집결하였다. 비슷한 시각 50-60명으로 추산되는 남성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이리여자중·고등학교 앞에서 집결하여 역전으로 달려가 합류하였다. 이로써 600여 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은 농대 학생들을 선두로 하여 질서정연하게 소리 높여 구호와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오전 10시 30분경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또다시 스크럼을 짠 중앙대 이리분교 학생들과 합류하였다.『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오전 11시 40분 경, 경찰당국에서는 학생시위대를 일절 저지하지 않고, 마이크를 단자동차 2대로 연도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군중들에게 귀가를 종용하며 시위대에게도 학교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계속해서 “계엄령을 즉시 철회하라”, “학생에게 수업을 계속 시키라”, “연행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전우가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이로 인해 경찰에서는 무장경관과 사복경관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하였으며, 소방차를 동원하고 경찰서 정문에는 더욱삼엄한 경계망을 쳤다.『조선일보』1960. 4. 21 조3면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3쪽 ; 4·19혁명 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1쪽
학생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합세하는 학생들이 증가하여 20일 정오에는 2천여 명에 달하였는데,『조선일보』1960. 4. 21 조3면 ;『동아일보』1960. 4. 21 조3면.
일부 기록에는 3천여 명으로 되어있다(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53쪽).
남성여중·고를 비롯한 이리상업고등학교, 원광고등학교, 이리농업고등학교, 이리공업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이리분교, 전북대 공대 및 농대 등 이리 대부분의 학교가 참여하였다. 이 중 남성여고 학생 방조자는 혈서로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확보하라”고 씀으로써 시위대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전북일보』4293(1960) 4. 21 3면
분류
시위 상황 / 이리 19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