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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태·허정, 이승만 대통령 방문하고 이기붕 은퇴 강조

21일 오전 10시 반 경무대를 방문토록 초치 받았던 재야인사들은 22일 오전까지 경무대 측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하여 사실상 방문이 좌절된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이 예측을 깨고 허정변영태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22일 오후 5시 경무대를 방문하였다. 이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치고 나온 이들은 약 20분간에 걸쳐 4·19사태의 발생을 중심으로 하여 그 원인 및 전망을 설명하였으며, 현하 비상시국의 수습책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허정,『내일을 위한 증언 : 허정회고록』, 샘터사, 1979, 212-213쪽 ; 마산일보사,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1960, 178쪽. 이 두 기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시간이 다르게 나와있다. 허정은 ‘약 20분간’이라고 하였으며, 『마산일보』사는 ‘약 1시간’으로 기록하였다.
이들은 4·19사태의 발생이 3·15선거의 불공정성에 항거하는 민족적 분노와 마산학생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압적 수단이 빚어낸 참극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고전했다. 특히 변영태는 이기붕의 자발적인 정계 은퇴가 흥분한 민중을 가라앉히고 험악한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해소시킬 것으로 믿는다고 설명하고, 재선거 실시 문제에관해서도 소신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변영태와 허정의 시국수습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에 대해 이 대통령은 분명한 언질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진언을 듣는 동안 이 대통령의 기색은 밝았기에, 시국수습에 있어 낙관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변영태는 특히 “이 대통령도 현재의 사태 진전과 앞으로의 수습책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고 전하였다. 이들은 이날 이 대통령으로부터 입각권유를 받은 일은 없으며 국무원 개편문제에 대해서도언급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협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3 조1면 ;『동아일보』1960. 4. 23 석1면 ;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81쪽.
이 대통령으로부터의 입각 권유에 대해허정은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있다. 허정은 이 자리에서 자유당이 저지른 부정의 진상을 솔직하게 말하고, 사태의 수습책으로서 ①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즉시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②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초당적 위치로 되돌아갈 것, ③각계각층의 인재를 등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해서 민심을 수습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이승만은 “내가 그렇게 하겠으니 미스터 허가 들어와서 나를 도와주어야겠어”하고 그 자리에서 허정의입각을 요구했다고 한다(허정, 212-213쪽).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변영태의 공개장이 글은 변영태 전 국무총리가 4월 21일 경무대로부터 초치받고 이 대통령과 만나게 되면 그때 직접 전달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나, 22일 오전까지 소식이없자 가까운 시일 내에 기회를 얻을 것같지 않자 22일 서울의 모 신문에 기탁한 것이라 한다. 변영태와 허정은 22일오후 이 대통령의 초청으로 경무대를방문하고 이 대통령과 요담하였다(마산일보사, 178쪽).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우리는 모두 중대위기에 있는 바 이것을 현명하게 또는 신속히 처리치 못하면 사태는 국가적 참화로 악화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급박한 정세에 직면하여다소 불쾌와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저로서는 직언을 아니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래 적은 말씀은 제 자신의 관찰이나 생각만이 아니고 모든 이의 느낌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파악하고서야 일반불평의 조수를 가라앉혀 공산도배의 발판을 없이 할 것입니다.
이번 학생소요사건의 원인은 조직적으로 또는 만폭적(滿幅的)으로 조종됨을 직접 목격한 불공정한 선거에 대한 거족적 분노와 마산학생 데모에 대한 경찰의 강압적 수단이 빚어낸 유혈참극에 있는 것입니다. 소동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지 물론 공산당이 거기 편승하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적어도 공산당과 아무 관련 없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학생소요가 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치는 당국의 성명은 일반의 분개를 가라앉히거나 억누르기는 커녕 도리어 부채질하고 마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이들 소란한 폭발의 배후에는 정당정치의 부패와 비행이 유치한 민중에 퍼진 불평이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을 파악함이 긴요합니다. 계엄령 하에서는 공공연한 데모는 일단 중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속아서 허망한 평온감을 갖는 것은 금물입니다. 거칠어진 국민의 기분이 진정되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사태는 지하로 들어가 생각지않은 여러 방면에 번져 일층 더 험악한 형태를 취할 우려의 근거는 많다 하겠습니다.
계엄령 실시 중 충분한 시정책이 작성되어 공포됨으로써 계엄령을 조속히 또 안전히 거둘수가 있게 되지 않는 한 계엄령은 하등 해결책은 될 수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사태는 벌써 너무 지나치게 진전되어서 어떤 미온책으로는 성과를 거둘 가망이 전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각하의 참고로 우책(愚策)의 이삼(二三)을 아래 적어 보나이다.
만일 이기붕 의장이 자발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한다면 험악하고도 침울한 분위기는 즉각적으로 사라지리라고 봅니다. 이것은 말하기가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체면을 얼마큼이라도 회복하고 그의 신변의 안전을 확보해 줄 다른 방도를 생각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시국이 전면적 혼란으로 악화됨을 보기를 재미있어하는 진정한 정부의 적은 이러한 제의는 조심조심 회피하는 것입니다.
저는 같은 취지의 논설을 서울의 어떤 건설적으로 비판적인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새 부통령을 뽑는 걸로 말하면 즉각 실시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모든 사태가평온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도 좋지 않은가 합니다. 사실 과거 4년 간 각하께서는 부통령 없는 것보다도 더 나쁜 형편을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의심받는 협잡들을 완전히 봉쇄하게끔 안출된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투표규정을 작성하여 그 엄격한 실천에 대한 굳고 진지한 서약과 함께 국민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당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2년 후에 이같이 새 방향을 잡은 자유당은 공정한 방법에 의하여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최악에 최악이 더하여 설령 자유당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부정한 술책을 금기함에 의하여 전면적 몰락을 당한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유당의 정치적 정직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립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정당이든지 소중히 여겨야할 유일의 영구적인 자산인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여 오는 국회의 방해전술이야 두려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맹목적 방해에는 민중은 권태를 느끼고야 마는 것입니다. 굿굿하고 수완있는 대통령이라면 골치는 많이 앓겠지만헌법이 부여하는 권한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행정부를 운영해갈 수 있을 것이며, 필경에 가서는 대수(對手)들을 도리어 불리한 처지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이 권력욕에 눈 먼 방해자들에 대한 일반의 증오감은 다음 선거에 대통령과 같은 당의 입후보자들을 다수 선출하는 결과에 이끌고야 말 것입니다.
잘인지 잘못인지는 덮어두고 민중이 소동의 어린 희생자들에게 극도로 동정하는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기억은 오래 애처롭게 되살 것입니다. 우리는 조만간 다 이 정서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억압은 해를 끼칠 뿐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민중과 같이 느낌이 정부의 위신을 돋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소요 수감자들을 최대한의 관대성을 가지고 취급하는 것이 건전한 정책일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각하의 특명에 의한 일괄적 석방이 가능하다면 전격적 효과를 거두리라고 사유하는 바입니다.
정부·정당·군 각 방면에 걸친 부패의 일소는 필수적인 과제인 것입니다. 수술이 가끔 전신의 죽음을 멈추는 유일의 수단인 것처럼 전면적 혁명을 피하는 단 한가지의 방법은 ‘국부적(局部的)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처사이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재정적 편혜주의(偏惠主義)와 국영 혹은 국가보조의 기업체들로 부터서의 여당자금의 갹출 악습은 금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권운동의 분자들은 당에서 숙청되어야 합니다.
당기(黨紀)가 일단 확립되면 당 운영에 드는 비용이라야 얼마 되지 않을 것이며, 그만한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쉽사리 변통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러한 당의 위신은 커질 뿐으로 일반 비당대중(非黨大衆)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인바 이들 부동(浮動) 대중은 정당들의 실적에 비추어 당과 당 사이로 오락가락하는 것입니다. 한 정당의 건전한 집권은 이들 부동층의 자발적지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딱 굳어진 파괴적 적의를 가지고 정당들이 국가 안의 국가들로 변해가는 것은 비참하고도 끔찍한 광경입니다. 정당들은 서로 반대하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아니라 기본인권을 보장하며 공정과 법 앞의 평등을 지키는데 선선히 협력하는 것도 배워야할 일입니다.
이 편지를 거의 마칠 즈음에 조간신문에서 각하의 역사적인 성명을 읽었습니다. 견딜 수 없이 답답한 분위기가 돌연 풀림을 육감으로 느끼는 듯이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느끼는 안도감은 동포들도 다 같이 느끼는 줄로 확신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 큰 서광에 뒤따라 구체적정책이 있으소서. 이 편지조차 군더더기라고까지 느껴집니다. 한번 다시 모든 국민의 대망이 각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벼슬자리도 스스로 사절했다는 탓인지 상술(上述)한 졸언(拙言)에 대하여 기분간(幾分間) 자기 이해를 초월했다고 말해도 좋다고 당돌히 생각합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저의 품은꿈 가운데 하나는 국부(國父)로서의 각하의 영명(榮名)이 지금이나 영겁을 통해서 때 묻지 않은 채로 모든 한인들의 마음 속에 존숭을 받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다시 저는 국운의 거룩한 소생과 그것과 함께 각하의 위대한 이름의 소생을 눈으로 보는 듯이 느껴집니다.
단기 4293년 4월 21일
시생 변영태 올림
출처 : 마산일보사,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1960, 178-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