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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집서 발포

오후 8시 반 경, 의사당 앞에서 전우가와 애국가 등으로 기세를 올리던 시위대 중 일부가 서대문 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의 경비망을 뚫고 이기붕 집을 향해 행진하였다. 1,500-2,000명가량의 시위대원들은 때마침 이기붕집 주변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것을 보자 그대로 “우-”하며 정문 앞까지 밀려들었다. 시위대는 “이기붕도 싫다! 공산당도 싫다!”, “살인선거 책임지라”, “이기붕은 우리 앞에 사과하라”고 고함치면서 대문을 뒤흔들고, 대문 바로 앞에 있는 경비실을 때려부쉈다. 뜰 안에는 경비원들이 있었는데, 시위대는 “경관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복경찰과 경비원 수 십 명이 곤봉으로 시위대원을 구타하였고, 시위대는 투석으로맞섰다.
이 무렵 세종로 쪽에서 트럭과 지프차에 실린 200명가량의 병사들이 동원되어왔다. 대대 이상의 병력은 시위대원들을 헤치고 ‘앞에 총’자세로 양 쪽 길을 막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병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시위대는 연이어 군가를 부르며 “국군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시위대원의 구호와 전우가 소리는 점차 소란해지고, 이기붕 집을 돌파할 듯 사태가 험악해질 무렵, 돌연 “탕! 탕!…”하는 총포 발사 소리가 났다. 최초에는 약간의 공포발사로 들렸으나 얼마동안의 간격을 둔 후 본격적인 실탄 사격이 일어났다.
발사 장소는 이기붕 집 안이었다. 군중은 군복을 입은 경비경찰관이 발사한 것으로 인정하고 “살인경찰관을 잡아라!”, “우리의 원수 경찰관을 죽여라!”고 고함쳤다. 이때 4명의 군중이 이기붕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대문은 굳게 닫히고, 집안에는 전등불마저 꺼져있었다.25일 시위대가 들이닥치자 이기붕 일가는 4월 19일에 이어 또다시 6군단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단이 이미 부통령 당선과 공직을 사퇴한 그를 어떻게 대우하여야 할 지 몰라 난처해하였다. 결국 군은 참모회의 끝에 이들에게 부군단장 숙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이기붕 일가는 이튿날 경무대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이틀간 은신한 끝에 28일 새벽 일가가 모두 자결하였다(조화영 편, 340쪽).조금 후 땅에 엎드렸던 군중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약 20분 후 세 번째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진동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땅에 엎드리고 3-4명이 쓰러졌다. 실탄 사격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던 군중은 새로이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다시 모여들어 구호와 고함을 지르면서 “또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차츰 험악하게 폭력화 하였다. 헤드라이트를 켰던 시발택시 1대와 전등불을 켰던 길가 민가 1동이 각기 약간 파괴되었다.
이기붕 집과 서대문 로터리, 서울고등학교 주변에는 도합 3천 명 가량의 군중이 후퇴할 줄 모르고 “정·부통령선거 다시하자”,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구호를 불렀다.
군대병력은 차츰 증가하여 약 600명의 사병들이 3각 지점에 포진하였으나 이들은 일절 발포하지 않았다. 서대문서 근처 파출소에서도 정복경찰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경찰서는 군대들이 경비하는 상태였다. 군중 틈에서는 곡성까지 터뜨리면서 “살인선거 물리치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서대문에서의 부상자는 약 12-13명으로 그 중 8명은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고, 나머지 4-5명의 중상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적십자병원의 부상자들은 대부분 경상자들인데, 의사는 이들이 엽총 산발탄에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동아일보』1960. 4. 26 석1·3면.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헌병과 경찰관으로 혼성되어 있던 경호대가 공포를 발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16쪽), 이기붕 집 발포는 계엄사에 의해 이기붕의 차남 강욱의친구 박인근 외 2명이 엽총 20발을 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고로 최성림(22, 남, 상업, 논산)이 중상을 입었으며, 기타 7명은 타박상을 입었을 뿐 죽은 자는 없다고 한다(『조선일보』1960.4. 26 조3면 ; 조화영 편, 160쪽).

계엄사 발표로는 이날 이기붕의 집 앞에서 부상을 입은 시위대원은 다음 8명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응급치료를 받고 귀가하였다.『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계엄사 발표 이기붕 집 앞 부상자 명단 •김세춘(남 24, 영등포 산290, 골절상) •김승혜(남 13, 문리사대부중 1년, 졸도) •김광일(남19, 오산고, 우복부 파편상) •은현배(남, 뇌좌상, 실신상태) •최정우(남 19, 서대문구 행촌동45, 졸도) •최성림(남 22, 논산읍 화지2동, 엽총상) •윤주남(남 19, 중동고, 1년) •김준호(남21, 묵정동 8-35, 인후출혈) 출처 :『조선일보』1960. 4. 26 조3면 시위는 오후 11시 반 경부터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계엄령 하의 통행금지 시간을 염려한 군중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기붕 집 안에는 600명 가량의 시위대원들이 “이대로 나가면 도중에 경찰 놈한테 붙들려 죽고 만다. 농성하자”는 측과 “군인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보호해 달라고 하자”는 측의 양론으로 한참 옥신각신 하였다. 그러나 경비사병들의 지휘관인 장교 하나가 군중 앞에 나와 “여러분은 우리의 형제요, 동포입니다. 우리가 무전으로 시내 각 서에 연락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하고 이들을 안심시켰다. 마침 계엄사령부 측에서 스피커를 통해 “우리는 여러분의 형제요 동포입니다. 아무런 염려 말고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하며 누차 부탁하자 차츰 헤어지기 시작하였다.동아일보 기자, 216-262쪽 ; 『동아일보』1960. 4. 26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