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 집서 발포
이 무렵 세종로 쪽에서 트럭과 지프차에 실린 200명가량의 병사들이 동원되어왔다. 대대 이상의 병력은
발사 장소는
약 20분 후 세 번째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진동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땅에 엎드리고 3-4명이 쓰러졌다. 실탄 사격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던 군중은 새로이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다시 모여들어 구호와 고함을 지르면서 “또 죽었다!”고 소리 지르며 차츰 험악하게 폭력화 하였다. 헤드라이트를 켰던 시발택시 1대와 전등불을 켰던 길가 민가 1동이 각기 약간 파괴되었다.
이기붕 집과 서대문 로터리, 서울고등학교 주변에는 도합 3천 명 가량의 군중이 후퇴할 줄 모르고 “정·부통령선거 다시하자”,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구호를 불렀다.
군대병력은 차츰 증가하여 약 600명의 사병들이 3각 지점에 포진하였으나 이들은 일절 발포하지 않았다. 서대문서 근처 파출소에서도 정복경찰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경찰서는 군대들이 경비하는 상태였다. 군중 틈에서는 곡성까지 터뜨리면서 “살인선거 물리치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서대문에서의 부상자는 약 12-13명으로 그 중 8명은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고, 나머지 4-5명의 중상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적십자병원의 부상자들은 대부분 경상자들인데, 의사는 이들이 엽총 산발탄에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를 헌병과 경찰관으로 혼성되어 있던 경호대가 공포를 발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현역일선기자동인 편, 116쪽), 이기붕 집 발포는 계엄사에 의해 이기붕의 차남 강욱의친구 박인근 외 2명이 엽총 20발을 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고로 최성림(22, 남, 상업, 논산)이 중상을 입었으며, 기타 7명은 타박상을 입었을 뿐 죽은 자는 없다고 한다(『조선일보』1960.4. 26 조3면 ; 조화영 편, 160쪽).
계엄사 발표로는 이날 이기붕의 집 앞에서 부상을 입은 시위대원은 다음 8명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응급치료를 받고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