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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부터의 원정시위로 감격과 불안의 쌍곡선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소식을 듣고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산은 멀리 부산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들이 들이닥쳐 혼란 가운데 무방비사태에 빠지게 되었다.일부 기록에서는 이들이 대부분 “주먹을 쓰는 깡패, 건달, 양아치, 구두닦이, 행상인이 태반이었으며, 이밖에도 홍등 가의 여인, 품팔이, 노동자도 더러 끼어 있었다”고 한다(3·15의거 기념사업회, 『3·15의거사』, 2004, 425쪽).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원정시위대의 수를 1천 명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26일 부산일대를 휩쓸던 이들은 오후 3시 경 트럭, 버스, 택시, 지프차 등 50여대의 차량을 몰고 마산으로 향하였다.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들이 타고온 차량의 수를 23대로, 이들이 마산에도 착한 시각을 오후 6시 경으로 기록하였다(『동아일보』1960. 4. 27 석4면 ;『조선일보』1960. 4. 27 조2면). 이들은 오는 중간에 이미 진영, 덕산, 창원을 거치면서 지서와 경찰서를 파괴하고, 무기고에서 총을 탈취하였다. 또한 경찰관을 때리고 제복을 빼앗아 입고 제모까지 쓰기도 하였다. 이들이 처음 마산에 발을 디뎠을 때는 부근 마을의 여인들이 “수고가 많았다”며 대접에 물을 떠서 목을 축이라고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내로 진입한 이들은 마산 일대를 휩쓸면서 마산시청,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 등을 두루 습격하여 파괴하는가 하면 서류 등을 꺼내다가 마구 뿌렸다. 또한 밤늦도록 고성방가와 거친 행동으로 소란을 피웠다. 이런 난동이 계속되자 계엄사령부에서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이어 마산에도 계엄령을 즉각 선포하였다. 39사단 병력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계엄군이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평도(40)와 김종술(16) 등 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야 계엄군의 완강한 제지와 마산의 민주당원과 학생간부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원정시위대는 마산상업고등학교 강당과 무학국민학교 교실에 분산, 배치되었다.3·15의거 기념사업회, 425-426쪽. 이들은 다음날인 4월 27일 아침 민주당 간부 이양수의 설득으로 자신들이 몰고 온 차량과 제15헌병 마산파견대 에서 주선한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들 중 일부 200명은 27일 아주 이른 새벽인 0시 30분 경, 트럭 3대에 분승하고 근처의 가야로 몰려갔다. 이들은 가야에 약 1시간 반 정도 머물면서 함안경찰서와 가야지서, 자유당 사무소 등을 파괴하고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다.『조선일보』1960. 4. 28 조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