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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인턴·레지던트 파업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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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23일부터 파업을 하겠다고 예고했던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을 비롯한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전국 4개 국립대학 부속병원 인턴·레지던트들은 22일 오후 각각 모임을 갖고 일단 파업을 보류한 뒤 당국의 태도를 관망하기로 했다.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인턴·레지던트들은 22일 오후 11시부터 강의실에서 전체회의를 열고 대표들의 파업결의안을 놓고 오후 9시까지의 토의를 벌였으나 끝내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치프(레지던트 4년차)들의 재량에 맡겨 일단 파업을 보류하기로 했다. 회의는 지난 6년 동안 해마다 되풀이된 인술파동에 매듭을 짓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인턴과 1, 2년차 레지던트들의 강경론과 환자 곁을 떠날 수 없다는 도의적인 문제에다 당국의 강경책으로 희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른 투쟁방법을 찾자는 3, 4년차 레지던트들의 온건책이 평행선을 달렸다. 오전 11시 투쟁의 주도권을 맡고 있는 20여 명의 치프(총원 37명)들이 약 3시간 동안 논의한 결과 “재파업하는 경우 파면 등 희생이 클 뿐더러 사회여론 등으로 비추어 볼 때 큰 이익이 없으니 23일 파업결의는 일단 철회하고 실효 있는 투쟁방법을 연구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져 최종결정이 총회에 붙여졌다. 오후 3시 강의실에서 인턴·레지던트 총원 189명 중 143명이 모인 가운데 1차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파업 찬성 88표, 반대 55표로 결국 규정상 출석인원 3분의 2선인 96표에 8표가 모자랐다. 3분의 2의 의견이 모일 때까지 계속 투표가 진행되어 오후 5시부터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2차 투표에는 더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중환자를 진료하던 사람까지 투표에 참가해 1차 때보다 18명 많은 161명이 투표했다. 결과는 파업 찬성 96대 66으로 반대수가 늘어났다. 3차 투표가 시작되기 전인 오후 6시 55분쯤 한심석 서울대 총장이 들러 약 20분간 학생들을 설득했고, 8시경에는 회의에 참석한 30명의 치프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고 파업만을 주장한다면 우리를 불신하는 것밖에 안 되니 여러분끼리 알아 처리하라”며 모두 퇴장했다. 치프들이 퇴장하고 남은 수련의 110명은 지금까지 투쟁을 이끌어 온 치프들을 불신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나 자기들의 의사만은 분명히 하자면서 다시 투표를 해 81대 29로 파업을 결의했다. 파업이 의결됐다는 통고를 받고 9시쯤 치프들이 다시 회의장에 들어와 “우리를 신임하면서 파업을 결의한 것은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뜻은 알겠으니 결정권은 우리에게 달라”고 호소, 이 뜻을 수련의들이 박수로 받아들이자 치프들에 의해 23일의 파업은 일단 철회하기로 했다. 이에 수석레지던트들은 “요구조건의 관철을 위해서는 계속 투쟁하겠으나 의사의 양심으로 차마 환자를 떠날 수 없으니 파업만은 보류하자”고 강경파들을 설득했고, 성명서를 내고 일단 파업을 보류했다. 성명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뇌와 번민의 연속 속에서 그간 사회각계 및 환자 제위에게 드린 불안과 혼란에 대해 충심으로 사과한다. 우리의 각 요구조항에 대한 당국의 공식적인 회답이 없지만 의사는 환자를 떠날 수 없다는 윤리적 대명제 아래서 우리는 일단 극악한 사태의 보류를 결정한다. 이 결정에 당국은 차선책을 공식 루트를 통해 알려주기 바라며 이에 어긋나는 경우 여하한 사태의 도래도 우리에게 슬픈 사태의 계속을 강요하는 것임을 당국은 직시하라.”『동아일보』 1971.7.23. 7면; 『경향신문』 1971.7.23. 7면; 『한국일보』 1971.7.23. 7면; 『조선일보』 1971.7.23. 7면; 『중앙일보』 1971.7.23. 7면; 『매일경제』 1971.7.23. 3면; 『매일신문』 1971.7.24. 7면; 『매일신문』 1971.7.24. 8면; 『국제신보』 1971.7.23. 7면; 『영남일보』 1971.7.24. 7면
분류
기타 / 기층민중 197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