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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원주교구, 원주 원동성당에서 기독교 합동 기도회 개최

1976년 1월 23일 원주교구가 주최한 일치를 위한 천주교·개신교 합동기도회가 원주 원동성당에서 개최되었다. 기도회가 끝난 후 함세웅 신부와 문익환 목사 등 성직자 8명이 모여 신현봉 신부가 작성한 선언문를 채택하였다.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 – 원주·춘천』, 2005, 65쪽;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편, 『암흑속의 횃불』 제2권, 1996, 37쪽.「선언문 -민족의 긍지를 찾기 위한 ‘원주선언’」
우리 신·구교 성직자는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가진 일치주간 행사에 참석하고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17,21) 하신 구세주의 기도를 우리의 그것으로 확인하였다. 인간은 한 어버이신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 특히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제 우리 신구교회는 전 민중과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우리의 견해를 이에 밝힌다.
1. 베트남 사태 이후 안보문제가 국민적인 중대 관심사로 대두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안보를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전 국민의 총화가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극히 중요한 관점을 지적하고 명백히 해둘 필요를 느낀다.
첫째 안보의 목적이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즉 무엇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것인가하는 문제가 명백해야 하며 절대로 흐려져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총화란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이룩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밝혀져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문제가 국민들 사이에서 밝혀지고 합의되지 아니 하거나 집권층에 의하여 왜곡될 때는 안보니 총화니 하는 구호가 도리어 자유를 질식시키고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음으로써 참된 안보와 총화를 해치게 하는 구실로 악용될 뿐임을 분명히 밝힌다. 안보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유보 내지는 사실상 포기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절도를 피하기 위하여 가진 재산을 모두 불태워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2. 우리는 역사적인 상황과 풍토에 따라 민주주의의 실제 운용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정치제도가 민주주의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근본이념이 있고 또한 최소한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파괴될 때는 이미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 근본이념이란 국가권력의 절대성, 무오류성을 부인하고 견해와 이익의 다양성과 가치의 상대주의를 용납하며 국가권력을 민중의 자유에 대한 가상 적으로 규정하여 부단히 감시, 견제, 제한하는 비판정신을 장려하는 데 있다.
그 최소한의 원칙들이란 주권재민, 기본적 인권의 최고 우월성 보장, 인신구속영장제도, 죄형법정주의, 비판적 언론의 자유, 신앙 사상 양심의 자유,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 생존권 특히 노동 3권의 보장, 3권 분립의 원칙에서 특히 사법권과 입법권의 행정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정당 활동의 자유, 그리고 공명선거의 보장 등이다.
3. 국민총화란 국민 각자가 평등하고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가운데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화해정신을 기초로 하여 평등과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보장하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지키겠다는 자발적 의지로 뭉치는 것을 말한다. 불평등 속의 총화나 억압에 의한 총화란 논리적으로도 모순되는 개념이며 현실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국민총화의 적은 바로 부패와 특권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억압과 착취의 질서이며 그로 인한 민권과 민생의 위축과 지나친 사회불균등이다. 총화는 침묵이 아니며 총화의 적은 비판과 저항이 아니다.
4. 우리는 민주인사들을 비애국으로 탄압하면서 애국과 안보를 혼자 떠맡는 듯이 하던 티우와 론놀, 바로 그들이 결정적인 시기에 조국을 버리고 거금을 싸서 도망친 사실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배는 난파되어도 선장용의 구명 보트만은 안전했다’는 사실은 압제자의 운명과 민중의 운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민중의 입장에 서서 사태를 보는 데 반하여 억압자는 시종일관 영구집권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입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5. 베트남 사태 이후 안보독재체제의 강화와 정비작업으로서 현 정권이 추진해온 주요 조치는 헌법개정, 전시상태 선언, 긴급조치 선포, 민방위대 조직, 사회안전법 제정, 방위성금의 강징과 방위세의 신설 등 각종 조세의 중과다. 또 통 반장 조직 등 전 국민에 대한 사찰과 밀고조직의 확대, 학원 종교 언론에 대한 사찰과 통제의 강화, 그리고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투옥과 재판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극단적인 억압정책은 일시적으로는 민중을 침묵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사멸시키게 된다. 이 결과 국민의 안보의지를 약화시키고 국민 내부의 불안과 분열을 누적, 심화시킴으로써 국민총화를 파탄시킴은 물론 우리나라를 국제적 고립화와 파멸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와 같은 모든 억압 조치들이 낱낱이 철회, 취소,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6. 근래 민주인사들에 대한 현 정권의 탄압은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김대중 씨에 대한 대통령 선거법 위반사건 재판은 우리나라의 법 질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탄압을 위한 것이다. 박형규 목사 등에 대한 이른바 선교자금 횡령사건 재판은 현 정권의 종교탄압이 거의 광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돈 준 사람이 잘 썼다고 칭찬하는 터에 횡령이니 배임이니 하는 죄목을 붙인 초법리적인 억지 재판은 민중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오늘날의 신 구교회의 억누를 수 없는 지향에 대한 어리석은 도전인 것이다.
김지하 사건은 민주세력 파괴 책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 정권은 그를 공산주의로 모는 일방적인 선전책자를 대량으로 배포하였으며 6개월이 지나도록 재판을 할 수 없게 되자 75년의 형집행정지 결정을 취소함으로써 무기수로 만들었다. 그에게 가해지고 있는 갖가지의 박해 가운데 우리는 성경을 마치 볼온서적시하여 차입해 주지 않는 데 대하여 크리스챤의 이름으로 엄숙히 항의한다. 정치보복이라는 설명 외는 납득할 길이 없는 김철씨에 대한 구속 기소도 시간을 끌면 끌수록 만인의 조소를 살 뿐이다. 이밖에도 많은 학생들이 다시 영장도 없이 투옥되었으며 민주세력에 대한 사찰과 감시는 전례없이 강화되었다. 우리는 현 정권이 위에서 말한 모든 수치스러운 재판 놀음을 즉각 걷어치우고 투옥된 민주인사, 애국학생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이 오늘의 안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선결조건이라고 주장한다.
7. 오늘날 우리 민중의 생활은 국민경제의 대외예속, 관료 독점자본주의의 부패성과 특권성, 그리고 이들로 인한 필연적 귀결인 물가고와 저임금, 중과세를 기초로 한 대중핍박정책 등으로 도탄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국민경제의 대외의존을 막고 전 국민이외국자본의 채무노예, 임금노예로 전락되어가는 현실을 광정(匡正)하는 것이 총화와 안보를 위한 또 하나의 선결조건이다. 또한 저곡가, 저임금정책을 떨쳐버리고 특권경제를 폐지하여야 하며 서민들의 조세부담을 대폭 경감하고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하며 노동운동, 농어민운동 등을 인정, 민중의 생존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아울러 도시 빈민, 판자촌 주민의 생존권도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8. 외세에 의해 갈라진 조국을 재통일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존엄과 화해의 정신에 입각한 자주 외교를 펴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세기사(世紀史)가 동족간의 긴장완화와 모든 민족이 자주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대로 향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지상과제다. 국민상호간의 우의와 신뢰에 기초하지 아니 한 관변을 통한 구걸외교, 기생외교로 민족적 긍지를 추락시지며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의 모순과 대립이 동서의 대결에서 남북의 대결로 옮아가고 있어 반식민, 평화공존, 비동맹, 피압박 민족의 단결인 제3세계 운동이 하나의 대조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 신구교회가 제3세계 사목운동을 전개하고 있음도 이에 연유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제3세계에서 버림받고 있음은 본질적으로 밖으로는 냉전시대의 유물인 강대국 일변도 외교를 청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독재적 억압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9.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방지되어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할 최대의 재앙인 까닭에 우리는 이의 방지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전 상태와 휴전협정의 불안정한 지속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와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남북대화를 진전시켜야 된다. 평화에서 패배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패배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서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정신만이 현재의 안보위기를 극복하는 첩경이며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 자주와 자립의 길을 찾는 정도이며 실추된 민족적 긍지와 자부를 되찾는 길임을 거듭 확인하는 바이다.
1976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