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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운동협의회 정식 발족, 자유·민주·인권은 국민 모두가 키워나가야

박정희 정권의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하고 법적 구제를 목적으로 한 ‘한국인권운동협의회’가 23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에 조남기 목사, 부회장에 김승훈 신부가 추대된 이 협의회에는 지도위원에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인사 14명이, 실행위원에는 조남기 목사 외 16명이 선임되었다. 가톨릭계에서도 지도위원과 실행위원에 윤형중·지학순·김병상·김승훈·오태순 신부 등이 참여하였다.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앞으로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등 사회 제 분야에서 가해지는 인권침해사례를 조사하고 수사와 공판과정에서의 법률구조 및 홍보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지방 교회여성연합회 등을 통해 지방과의 연합활동도 활발히 하기로 했다.
협의회는 이날 발족 성명서를 통해 자유, 민주, 인권은 국민 모두가 지키고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328쪽;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제3권, 가톨릭출판사, 1996, 209쪽.; 「인권 쟁취를 위한 협의회를 발족하며」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 속의 횃불』 제3권, 가톨릭출판사, 1996, 233~235쪽.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다년간 누적, 가속되어 온 인권침해, 인권부재의 현실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인권운동협의회’라는 모임을 가지고 그 발족을 선언합니다.
본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신·구교의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학자, 법률인, 언론인 등 모든 관계자들 중 뜻있는 인사들이 참여하였으며 이 땅의 억눌리는 국민들의 인권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대응하고 예방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본 협의회는 노동자, 농민, 학생, 지성인 등 사회 모든 분야에 가해지는 인권침해 사실을 조사하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법률구조 및 홍보활동을 강화할 것을 다짐합니다.
본 협의회는 지난해 1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열린 인권문제 세미나에서 신·구교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각계 인사들의 요청에 따라 발족하게 되었으며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산파역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무슨 이유로 연행되었는지, 심문받는지, 공판 중인지, 유죄판결을 받았는지, 몇 년형을 살고 있는지, 언제 나오는지를 모르게 되었으며 누가 왜 해고를, 퇴직을, 제적을 또는 감시받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누구든 몇 명이든 간에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붙들려가기도 하고 조사받을 수도 있다는 것은 거슬러 생각해 보면 국민 누구나가 이러한 운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재난은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일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 사회에서 두 다리를 뻗고 고요히 잠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누구든지 간에 의식했든 안했든 불신과 불안과 공포가 보이지 않는 가슴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근로자들은 향상 해고와 실직의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해고의 방문(傍文)이 붙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업가는 종업원들에 대해 가히 제왕적(帝王的)으로 군림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업원들에게는 기업가의 횡포를 견제할 방패막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업인은 어떤가요. 그들도 또한 가중한 세금과 거미줄 같은 법망 앞에 초연할 수는 없습니다. 각종 법망 앞에 그들은 거의 노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행정권의 발동, 세무관찰이란 서슬 앞에서 아마 오금을 못 펴고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무원은 어떠한가요. 그들은 사회 온갖 분야에서 행정권의 발동이라는 칼날을 쥐고 군림하는 가장 안전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들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무능이다’, ‘비위다’ 하는 또 하나의 공포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과연 온전하고 평안한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근로자들, 기업가들, 공무원들 각기를 ‘그들은’ 하고 불렀습니다만 그러나 인권에 관한 한 결코 ‘그들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들’인 공동 피해자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권에 관한 한 누구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박받는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다시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과 같은 악순환의 사슬인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일제(日帝) 치하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식민통치에서 가열된 인권유린 상습화가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못하고 국민을 철권으로 다스리려는 의식, 무의식의 권력 폭력형 사고가 30년 후인 오늘날까지도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5.16 후 장기 집권과 유신체제 그리고 긴급조치로 해서 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정신은 결정적으로 파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비판과 견제와 균형의 모든 사회제도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권력의 집중화와 자의(窓意), 경제의 독과점화, 사회의 몰가치화(沒價値化), 문화의 획일화 현상 등이 나날이 클러즈업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수평적 유기적 관계는 깨어지고 수직적 상하 관계만 남게 되고 국민들은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생존경쟁의 논리에 빠져 서로 헐뜯고 서로 협잡하고 할퀴는 속에서 생채기뿐인 심신의 고통에 신음하면서 그것을 숙명적인 인과(因果)로 체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도덕과 불의와 불신에 대해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자유와 민주를 토대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부르짖는 많은 선지자(先知者)들이 있습니다. 사회정의와 학원의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 이들에게 진리와 양심이 무엇이냐를 가르치던 많은 교수들, 문인들, 언론인들, 성직자들 그리고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노동자 및 노동운동가들. 이들은 그들이 진리를 말하고 현실의 비극적 결말을 예언하고 경고했던 바로 그 이유에서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리고 외쳐야 할 그 자리에서 쫓겨나 광야로 내몰리거나 투옥되거나 감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 협의회는 이러한 인사들의 현실적 고통과 탄압받는 인권을 보살피는 일에 그 일차적 노력을 다하려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이 자기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려 한 숭고한 이상, 국민적 인권이자 바로 우리 자신들 모두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넓혀갈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와 인권은 몇 사람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민 모두가 함께 지키고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 협의회는 인권이란 단어가, 인권운동이니 하는 운동이 이 사회에서 불필요하게 될 때까지 우리의 인권운동을 국민 모두와 함께 전개해 나갈 각오입니다. 그리고 운동의 필요성이 하루라도 빨리 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자유와 민주와 인권 불가침의, 불가양(不可讓)의, 불멸의 진리가 이 땅에 어서 오기를 기도드립니다.
1978.1.23.
인권운동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