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979년 문화인 선언」 발표
1979년 8월 11일 YH회사의 여공들이 경찰 폭력배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김경숙 노동자가 무참히 죽어간 사건은 우리 사회의 누적된 모순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고 이른바 ·유신체제의 전체적 허구성을 여실하게 보여 준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은 현 정부가 정치적 독립, 경제적 자립, 문화적 자율성을 이룩해야 할 근대화, 민주화, 산업화 작업에 실패하고 우리 민족을 파행적인 국면으로까지 몰고 간 것에 대하여 그 동안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시하고 이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해왔다.
특히 이번 YH 여공들의 사태에 있어서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간사인 시인 고은씨가 문동환, 이문영, 인명진, 서경석씨와 함께 구속되었다. 문학인이 이 땅의 헐벗고 굶주리고 짓밟히는 노동자와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은 영광이지만 날조된 불순세력 운운의 명목으로 수난을 당한다는 사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이에 우리 문학인들은 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 지성인, 청년, 학생, 농민, 노동자들과 전 세계의 모든 동료 문학인, 민주인사들에게 우리의 뜻을 밝히는 바이다.
우리는 YH 여공들의 이번 사태가 우연 발생적으로 나타난 듯이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민족 현실의 잔인한 실상을 반영하는 역사적 객관성을 띄고 있는 사건임을 알고 있다. 현 정권은 거의 20년 전인 1961년 국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그 경제개발 정책은 외세 의존적이며 반민중적인 기반 위에서 출발하였던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대다수는 오히려 경제개발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정권은 더욱 독재화하였고 자본은 날로 독점화하였다.
이른바 고도성장을 배타적 가치로 내세워 빵을 크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돌린 결과는 극소수의 자산 소득가로 하여금 그 빵을 독차지하게 하여 근로 소득자의 8할을 과세소득 미달자로 만들었으며 절대빈곤 인구만 하여도 당국의 통계로 2백만명 이상이 되는 경제 파탄의 상황을 낳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1970년 11월 13일 하루 수입 70원에서 1백원 정도의 노임으로 14시간 내지 16시간씩 일하는 나이 어린 소녀들의 참상에 마지막 항의 수단으로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피복 근로자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함에도 현 정권은 1971년 12월 17일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근로자의 노동 3권 중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의 행사를 규제함으로써 더욱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이와 아울러 국가 비상사태, 위수령, 비상계엄령, 유신현법, 특별명령, 특별선언, 긴급조치 등등의 극단적인 민권 압살정책을 연달아 강행하여 민주인사들을 무더기로 잡아 가두고 언론을 탄압하고 학원을 요새화하여 1975년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의 죽음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현 정권이 들어선지 20여년에 가깝지만 민중은 속수무책으로 저들의 기만과 폭력에 노예처럼 굴종하여 오늘과 같은 모든 상황을 용인하고야 말았다. 지난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벌어진 처참한 폭력극이야말로 저들의 민권 탄압이 노동자들의 생존 박탈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현 정권이 외세와 결탁하여 키운 독점자본의 행패가 극에 달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는 어린 소녀 근로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이곳 문을 두드리고 저곳 벽을 더듬으며 떠돌다가 그나마 양심의 최후 보루인 종교인을 찾고 문학인에게 하소연한 사실을 가리켜 불순세력의 개입이라고 생떼를 쓰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악덕기업 YH회사에 대한 일방적인 비호는 우리의 민족 상황이 동족에 의한 식민정치의 양상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케 하고 있으며 현재의 처절한 노동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과 자세를 갖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이번 사태에서 한국노총은 드디어 권력의 발부리에 기생하는 집단임이 명백히 드러나고 말았다. 작년에만 하더라도 나이 어린 여성 근로자들에게 똥을 먹인 동일방직 사건을 위시해서 평화롭게 운영되는 노동교실을 폭력으로 분쇄한 평화시장 사건, 몇 십년간 근속한 근로자의 퇴직급을 지불하지 아니 한 조광피혁 사건, 과외근무 수당을 잘라먹은 방림방적 사건, 불법적인 12시간 노동으로 혹사케 한 해태제과 사건 등 부지기수로 인권유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농촌과 농민에 대한 억압은 그 정도를 넘어 가톨릭농민회 사건과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을 낳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의 기본권을 앗아가고서 이를 종교인과 지성인의 방조, 교사에 의한 것이라고 덮어씌우는 것은 현 정권이 인간의 양심, 정의, 평화, 진실을 처벌하고 죄를 주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분노하고 항의하며 절규한다. 우리는 더 이상 슬픔과 자책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의 무능과 나약을 질타하여 실천과 결단의 힘을 모으고자 한다. 우리 문학인들은 이 땅에 민족통일, 민주회복, 정의구현, 자유실천을 이룩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4월 ‘구속 문인들을 위한 문학의 밤'에서 비록 당국이 문학인들을 가둘 수 있을지는 모르나 문학을 가두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아직도 감옥에서 신음하는 문익환 시인과 김지하 시인에 대하여, 그리고 이번의 고은 시인의 구속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시 이 말을 반복한다. 당국이 시인 고은씨를 가둘 수는 있을지라도 그의 문학을 가두지는 못한다. 우리는 안과 밖에서 우리의 문학을 위하여 싸울 것이다. 우리는 거듭 요구한다. 긴급조치와 특별조치법을 즉각 철폐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노동자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 언론 탄압을 중지하고 구속 인사들을 남김없이 석방하라. 폭력 사태의 책임자를 엄벌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 우리는 김경숙 노동자의 죽음과 더불어 끝까지 싸울 것이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 분류
- 민주화운동 / 문화·예술 1979-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