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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학생데모

4일 오전 10시 고대생 1200여 명은 동교 교정에 모여 연 7일째 3선개헌반대성토대회를 열고 11시 5분 또다시 교문을 뛰쳐나왔다.
이날 학생들은 ‘고대’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헌정사수 개헌결사반대”라고 쓴 피켓을 흔들며 성토를 벌였다.
이날 학생들은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한 후 신랑 ‘자유당’ 신부 ‘공화당’의 허수아비를 만들고 축 ‘최인규’라는 벽보를 써붙여 풍자적인 결혼식을 거행,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가졌다.
한편 학생들은 언론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채택했다.
이날 교문을 나선 데모학생들은 홍릉 미아리 성동역과 안암동 로터리 쪽을 4진으로 나누어 시내로 진출했으나 성동구 마장동 동대문구 신설동 성북구 종암동 및 종로5가 등지에서 경찰에 저지되어 일부 학생들은 교정으로 돌아와 대강당에서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고 있으며 시내에 흩어진 학생들은 오후 시내 모처에 집결할 기세다.
이날 고대생 데모에서 정외과 2년 박동진 군(22) 등 고대생 24명과 박영욱 씨(23) 등 민간인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통계과 이유권 군 등 14명이 경찰에 연행됐다.『동아일보』 1969.7.4. 3면, 『매일신문』 1969.7.4. 7면, 『한국일보』 1969.7.4. 3면
언론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1960년 4월, 독재와 부의의 사슬을 끊고 정의의 불길을 터뜨리던 그 날, 우리의 언론은 그 뜨거운 횃불을 휘두르며 그 얼마나 통쾌한 전사를 기록하였던가? 그날 뿐 아니다.
돌이켜보면 근대화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보수에 대하여 혁신을, 사대에 대하여 자주를 부르짖으며 감행한 그 과감한 투쟁.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도전, 항거한 그 가열한 구국투쟁.
지긋지긋한 일제의 탄압 아래서 인고의 쓰라림을 삼켜가며 벌인 현대화투쟁, 그리고 독립 후로도 보여준 그 용기 있는 반독재 민주수호투쟁 등, 근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언론이 뿌려준 고귀한 피와 땀의 공적은 실로 눈물겹도록 대견스러울 뿐 아니라 영원토록 찬연히 빛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네 주위엔 다시 반민주적 반역의 풍조가 풍미하고 있는데 이러한 풍조를 통쾌하게 질타하던 언론은 그럼 어디로 가고 말았는가?
지사적 긍지와 용기로써 난국을 파헤치고 전진하던 옛날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왜 모두가 저 먼 편의 불인 양 관상만 하는 방관자로 주저앉고 말았는가? 심지어는 야차귀의 시녀로 타락하지 않았는가?
왜 선정과 색정으로 넘쳐흐르는 보도 풍조만 판을 치고 있는가? 소비적이고 퇴폐적이며 소시민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기에만 왜 혈안이 되어 있는가? 반민주질서의 홍수 속에서 썩어가는 민주정의의 이상이 보이지 않는가?
언제부터 언론은 그렇게 백성의 권익에 등쳐서 지배계급에 아부하는 아첨배가 되고 말았는가? 아첨으로 배를 불리며 백성의 내일을 장사지내려는 상여꾼들이여, 가라, 한가하고 유복한 장사치 지배계급의 충실한 호위병들이여, 가라, 저 골고다의 계곡으로 사라져 가라. 무기력한 필봉은 무기력한 백성을, 마취당한 필봉은 마취당한 백성을 만들 뿐이 아니냐? 우리는 언론마저 좌절당하고 무력화 해 버리고 또는 아첨해 버리는 그런 오늘의 한국현실을 통곡한다.
언제나 어둠을 밝히는 위대한 횃불이었던 언론인이여. 부디 그 반동적인 내적·외적 압력을 의연히 박차고 일어서라, 궐기하라.
다시 이 병든 하늘에 불의 노호를 발화하라. 역사는 가장 위대한 너의 불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국은 순간이 두려워 역사를 그르치는 나약한 간신배 보다는 죽음 앞에 서서 당연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던 갈릴레이의 그 용감한 신념과 투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69. 7. 4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각 대학 학생 선언문」, 『사상계』 1969.9,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