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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촉구한 전단지 배포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22일 오전 5시 서울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5만여 명의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16년 만에 처음으로 기독교 각파 합동으로 베풀어졌다. 명동성당에서도 이날 오전 7시~오후 7시까지 10차례 부활절 미사가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모든 교회는 죽어가는 이 세상의 부활을 위해 병들고 썩고 죽은 그것까지 소생시키는 자비의 대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73.4.23. 7면; 『동아일보』 1973.4.23. 7면; 『조선일보』 1973.4.24. 6면; 『매일경제』 1973.4.23. 7면
이날 남산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했던 권호경 등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나라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의미에서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촉구하는 전단지를 제작, 배포하였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Ⅰ』, 1987, 254~274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1983, 256쪽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1973년 4월 22일 새벽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박형규 목사, 권호경, 김동완 전도사 등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실무자들과 나상기 등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KSCF)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회개하라 이후락 부장”, “꿀먹은 동아일보 아부하는 한국일보” 등의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촉구하는 전단을 제작, 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제작한 전단을 4월 22일 부활절연합예배 후 배포하려 했으나 경찰과의 충돌이 예상되는데다가 상황이 살벌했기에 계획대로 배포하지 못하였다. 단지 KSCF 회원들이 새벽 연합 예배에 참석하고 귀가하는 교인들에게 일부를 배포하였을 뿐이었다. 2개월 뒤 전단이 당국의 손에 들어가 중앙정보부 지휘 아래 남대문경찰서는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색출 작업에 착수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보안대원을 사칭한 혐의로 이종란을 연행, 조사하던 중 이와 관련된 내용을 알게 되면서 보안사에서 본격적으로 수사가 이뤄졌다. 6월 29일박형규·권호경 목사가 보안사에 연행되었고, 6월 30일 김동완 목사, 7월 1일 나상기 KSCF회장, 7월 2일 황인성, 이상윤, 정명기, 서창석 등이 연행되었다. 서울지검 공안부 정명래 검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이 4월 22일 부활절 연합예배날을 거사일로 결의하고 10만여 군중 속에서 전단을 뿌렸으며, 플래카드를 들고 행동대원이 네 개의 방향으로 군중들을 유도,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면서 중앙방송국을 점거, 중앙청을 비롯한 관서들을 점령할 계획 등 거창한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공안당국이 사건을 확대, 과장하며 초강경하게 나오자 7월 1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임원회는 이 사건에 관하여 논의한 후, 회장단이 법무부장관을 면담키로 하는 한편, NCC 실행위원회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내란예비음모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 문제를 위해 NCC 회원, 교단 총무, 총무단이 추천하는 법조계 인사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키로 하였다.
1973년 7월 22일 서울제일교회에서 1주간 구속자를 위한 특별 철야기도회 개최하였고, 7월 2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대책위를 구성했다. 8월 1일에는 종교계 주요인사인 한경직 목사, 백낙준 목사, 김옥길 박사, 김관석 목사 등이 국무총리 김종필을 면담하였다. 8월 6일 한국기장 서울노회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8월 7일 기장에서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관련하여 성명 ‘교역자 구속사건과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8월 20일에는 초교파적인 아침기도회 개최와 초교파적인 대책위를 구성하였다.
8월 21일 1차 공판(재판장 김형기 부장판사)이 열렸고, 8월 28일 2차 공판, 9월 12일 3차 공판, 9월 18일 결심 공판이 열렸다. 국내외의 관심 속에 진행된 9월 25일 공판에서 재판부는 박형규, 권호경에게 각각 징역 2년을, 남삼우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고, 이종란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하였다. 9월 27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은 돌연 박형규, 권호경, 남삼우 등 세 피고인에 대한 보석을 결정, 보석금 10만원에 풀려나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9월 28일 「교직자와 전우에게」, 「국내 타 교파에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기독교 교파로는 처음으로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기독자의 사명을 밝혔다. 정부에 대해서 ① 하루 속히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정상화할 것 ② 경제적 격차 해소 ③ 박형규 목사 등 구속 교역자에 대한 공정한 재판 등을 촉구하였다.
이 사건은 10월 유신 이후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와 NCC는 즉각 모임을 갖고 성명을 내는 등 대책활동에 들어갔는데, 단순히 이들의 구명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교회의 인식을 제고시키면서 민주화 인권운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대책운동 과정에서 소장 목회자들이 연결되고 결집되기 시작하면서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각 교단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도서출판 선인, 2006, 240~241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Ⅰ』, 1987, 254~274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1983, 256쪽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은 구속자 가족들이 어떻게 활동해야 구속된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바깥의 지원세력과 어떻게 연계활동을 해야하는 지 등 가족들의 활동 내용이 정립되는 단초를 만들었다. 구속된 박형규 목사의 부인 조정하 여사의 적극적인 활동은 NCC 김관석 목사 등이 기독교계의 연대활동을 촉진하였고, 특히 한국교회여성연합회(회장 이우정)와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회장 주재숙)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구속자와 가족들을 돕는 일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과 기독교계의 활동은 해외에서도 한국 상황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설이·김경은,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30~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