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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씨가 밝힌 사건 경위

김대중씨는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귀환한 후 기자회견을 갖고 피랍 5일간을 설명했는데, 그때 밝힌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경향신문』 1973.8.14. 1면; 『동아일보』 1973.8.13. 1면; 『조선일보』 1973.8.14. 1면; 『매일경제』 1973.8.14. 7면

나는 8일 오전 11시쯤 동경 그랜드팔레스 호텔 2211호실에 묵고 있는 양일동 통일당 당수와 점심을 같이하기 위해 찾아갔다. 국내에선 양씨에 대해 오해가 있는 모양이나 그렇지 않다. 점심자리엔 나중에 김경인 의원이 와서 합석했다.
경호원은 한사람 데리고 갔으나 22층에는 머무를 수가 없어 1층 로비에 있으라고 내려 보냈다. 낮 12시40~50분쯤 점심을 끝낸 뒤 일어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복도로 나왔다. 일본 사또내각 때 관방장관을 지낸 기무라 도시오씨와 2시에 만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도로 나올 때 양씨가 김의원에게 아래까지 모셔다 주라고 했다. 복도에 나오자 건장한 청년6,7명이 저쪽에서 나와서 가까이 접근하더니 앞을 막았다. 김의원이 소리를 지르고 나도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갑자기 나에게 덮쳐 양씨 옆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무엇으론가 입을 꽉 막았다. 마취제였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내가 마취제 약이 잘 안 듣는 체질이었던지 마취효과가 강하지 못했다. 머리 속에 빨간 불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물아물 거리다 일단 정신을 잃었다.
그들에게 끌려나올 때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깨어난 것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정신을 계속 잃은 것처럼 축 늘어진 시늉을 하였다. 엘리베이터에 실렸다. 도중에 일본인 남녀가 타서 그들을 보고 “사람 살리라”라고 소리치자 납치해가던 3,4명이 막 때려 다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일본인 남녀는 정신을 잃기 전에 7층에서 내린 것 같다.
호텔 지하실 차고로 끌려 내려온 뒤 자동차에 실렸다. 그 청년들은 자동차 안에서 그들의 무릎 위에 나를 엎어 놓고 입을 막았다.
자동차에 실려 5,6시간 달렸다. 무척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마취가 잘 안 듣자 그들은 나의 배를 찼다.(김씨는 왼쪽다리의 검붉게 멍든 자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짐작컨대 오사카(大阪) 근방까지 온 것 같았다. 교통순경들이 검문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일행 중 한사람이 저리로 가자고 했다.
차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경찰의 검문은 허술한 것 같았다. 방향을 바꾸자 그곳은 검문이 없었다. 일본경찰이 검문을 철저히 했다면 거기서 잡혔을 것이다.
자동차가 멎자 차고로 끌려갔다. 엘리베이터로 실려 올라갔다. 거기서 뉘어진 채 손발이 묶이고 얼굴은 코만 남겨 놓은 채 양쪽 귀까지 온통 화물포장용 테이프로 감겼다.
그러고는 다다미방에 옮겨졌다.(김씨가 여기까지 말할 때 동경에 있는 김경인 의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씨는 김의원에게 “나 김대중이요. 해상에서 사흘, 육상에서 이틀 있다가 우리집 근방에 태워다주어 집에 왔다. 몸은 괜찮다”라고 말했다.)
이제부터 물고문을 당하는가 했다. 그러나 다시 자동차에 실려 1시간 이상 달렸다. 바닷가에 집어던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시 모터보트에 실렸다. 보트에 타자 보자기를 씌웠다. 보트가 1시간쯤 달렸다. 큰 배에 옮겨졌다. 큰 배에선 뉘어놓고 처음의 결박을 풀고 다시 온몸이 단단히 묶였다. 그때가 다음날인 9일 새벽 1시쯤이었던 것 같다. 조금 전 그들끼리 12시50분이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어떻게나 훈련이 잘 돼 있는지 절대로 다음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식사 봐주는 사람은 친절했으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여기가 어딘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위에서 다시 끌려 내려졌다. 선내의 밑바닥 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결박을 다시 했다. 그러고 나니까 발을 뻗으려 해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등 뒤에는 가마니를 붙여야 하느니 자기들끼리 얘기했다. 그때 마지막 하직이라 생각했다.
배가 미친 듯 속력을 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비행기다”라고 했으나 비행기가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추측컨대 배가 10여 시간 돌아다녔다. 방향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북행이었다면 북양까지, 남행이었다면 사모아도(島)가지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일본 시고꾸 도꾸야마”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11일 오전 육지에 도착했다.
육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음료수와 담배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배에서 내리기 직전엔 의사가 와서 치료도 해주었다. 혈압을 재어보고는 혈압이 낮다고 혈압을 올려준다는 주사를 놔주었다. 40세 가량의 의사는 얼굴이 넓적하고 풍채가 좋았다.
육지에 내린 다음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우리는 구국동맹행동대”라고 말해 “그게 뭐하는 단체냐”고 물으니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뒤에 “구국동맹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반공하는 단체”라고 말했다. 육지에 도착하자 자동차에 태워졌다. 자동차를 두 번 갈아탔다. 2,3시간 후 어떤 초가집에 다달았다. 집에 들어가면서 “집이 누추하지만 참아달라”고 말했을 때 처음으로 이곳이 한국이라고 느꼈다. 역시 입은 틀어 막히고 손발은 묶인 채였으며 눈도 가린 상태였다. 초가집에서 그들이 주는 알약 2개를 먹고 잠이 들었다. 깨보니 외딴 양옥집 2층이었다. 그것이 12일 아침이었다. 그곳에서도 눈은 계속 가리워졌다.
그러다가 13일 오후 8시경 처음으로 “집으로 보내 줄테니 약속을 지키겠느냐”고 물어왔다. 집 앞에 내려줄테니 그곳에서 3분쯤 서 있다가 그 뒤에 눈가리개를 풀고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악을 쓰거나 하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내가 그 정도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 같으냐”고 반문했다. 그들은 나를 승용차에 태웠다. 일행은 3명. 내 양옆에 각각 1명씩 2명이 앉고 나머지 1명이 운전했다. 차에 태워진 다음부터 몸의 속박이 풀렸다.
승용차로 2시간 동안 오면서 그들과 국가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은 나에 관해 그럴듯하게 오해하고 있었으나 내 얘기를 듣고 많이 이해한 것 같았다. 그들은 동교동 동교교회 근처에서 나를 내려주고 “서서 오줌 누는 척 하라”길래 나는 오줌을 누고 집으로 걸어왔다. 거리는 50~60m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