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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임헌영·김우종·정을병·장병희 씨 반공법 위반 및 간첩혐의로 구속

서울지검공안부 정명래 부장검사는 5일 서울을 기점으로 한 ‘문인 및 지식인 간첩단’을 지난 1월 26일 적발, 이호철(43·소설가), 임헌영(34·문학평론가·중앙대 강사), 김우종(45·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정을병(소설가·한국가족계획협회 지도부장), 장병희 씨(41·문학평론가·국민대 강사·필명 백일) 등 5명의 문인을 반공법 위반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언론인 천관우 씨 등에 대해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검거된 문인 중 이호철, 임헌영 두 사람은 1월 7일 문인 61명의 이름으로 나온 ‘개헌지지성명’에 참여했다.
구속된 5명의 문인은 북한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직계인 재일공작지도원 김기심에 포섭되어 문단 언론계 학원 등의 동태를 보고하는 한편 반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작품 활동과 북한 지령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문인 개헌성명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1974.02.06. 1면; 『경향신문』 1974.02.05. 1면; 『동아일보』 1974.02.05. 1면; 『매일경제』 1974.02.05. 7면; 『중앙일보』 1974.02.05. 7면 공소사실의 요지는 문인들이 일본 민단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한양』의 관계자들(조총련계)로부터 금품과 접대를 받았으며, 그 잡지에 기고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74.02.06. 1면; 『경향신문』 1974.02.05. 1면; 『동아일보』 1974.02.05. 1면; 『매일경제』 1974.02.05. 7면; 『중앙일보』 1974.02.05. 7면
문인간첩단사건 1974년 2월 5일 검찰은 일부 문인 및 지식인들이 지난 1949년 북한의 통일전선 공작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북한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직계인 재일공작지도원 김기심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검찰에 의하면 재일지도원 김은 지난 1962년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재일거류민단에 위장 입적한 후 『한양』사를 창설하여 도일하는 문인, 교수, 학자 등 지식인 50여 명과 접촉, 포섭 대상자를 골라왔다. 이번에 구속된 5명은 김의 1차 포섭 대상자에 들어 지난 69~72년 사이에 포섭된 후 ①한국의 문단, 언론계, 학계, 학원 동태를 보고 ②반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작품 활동 ③문인, 지식인 중 포섭 가능자 명단을 보고하고 ④지난 1월 7일 현 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문인 개헌 성명의 주도적인 활동 등을 해왔다는 것이다.
구속된 5명의 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호철=지난 1950년 10월 인민군에 복무 중 국군에 포로가 된 후 호송 도중에 달아나 월남하여 작가 생활을 해왔다. 지난 1972년 11월 일본에서 개최된 팬클럽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재일지도원 김기심과 7회에 걸쳐 접촉, 6회의 향연과 공작금 50만 원을 받고 간첩으로 포섭당한 후 다른 재일지도원 김 모(35)에게 인계되어 자신의 원산중학 졸업성적표 및 사진 1장을 받고 ①현 정권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작품 활동으로 대중을 선동할 것 ②문인 중심의 반정부 세력을 만들어 투쟁할 것 ③진보적 사상을 가진 문인을 추천, 포섭할 것 등의 지령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지난해 11월 20일 기독교방송 공개토론에서 “현 특권층이 썩은 것처럼 대학교수도 썩어가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지난해 12월 20일 한국신학대학 학보에 평화시장 재봉공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소재로 하여 지식인과 학생들의 봉기를 선동하는 글을 실었으며, 지난해 12월 23일 개헌서명 발기인으로 활동, 지난달 7일 개헌지지 문인시국성명에 간사로 주동역할을 해왔다.
▲임헌영=전 『다리』지 주간인 임 씨는 지난 1971년 11월 일본에서 발행되는 불온간행물 『한양』지에 한국문학에 관한 좌담이란 글을 투고했다. 72년 1월 15일 김상현 전 국회의원의 도일시 함께 따라가 재일공작지도원 김기심 등에게 포섭, 일화 40만 엔, 라디오 1대, 『한양』지 6권 등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국내 문인의 실태 및 정부의 처우 등을 수집, 보고하고 지난 1월 7일 개헌지지 문인성명에 가담했다.
▲김우종=지난 1964년 4월부터 재일 불온잡지 『한양』지에 10여 편의 원고를 기고, 1972년 1월 8일 일본에 유학 갔을 때 재일공작원 김기심에게 포섭, 25회에 걸쳐 일화 100만 엔 상당의 주연을 받았고 일화 20만 엔 녹음기 1대 『한양』지 5권 등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정부가 국내 신문 및 잡지사에 “기관원을 고정 배치하여 언론을 탄압하고 있다”는 비방 내용을 『한양』지에 실었고, 국내 학생 동향 및 경희대 데모 주동자 명단 및 문인 교수들의 실태를 보고했다.
▲정을병=지난 1970년 4월부터 「나병환자」라는 소설 등을 『한양』지에 실었고 재일공작원 김기심과 접촉, 6회에 걸쳐 30만 엔 상당의 주연과 일화 15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사회부조리 현상을 각 보도기관에 투고하여 대중을 선동하라는 지령으로 귀국했다. 이후 1971년 8월경 ‘모래섬’이란 제목으로 한국어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한양』지에 실었다.
▲장병희=1964년 4월부터 재일 불온잡지 『한양』지에 10여 회에 걸쳐 글을 실어 한국사회의 부조리현상을 비방했고, 지난해 6월 17일 제3회 아시아작가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김기심과 접촉, 전후 4회에 걸쳐 일화 40만 엔어치의 향연을 받고 포섭된 후 일화 20만 엔과 카메라 1대 등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지난해 4월 16일자 국민대 학보 사설에 ‘한국의 선거는 부정한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검찰은 이들 간첩단과 관련된 일당의 여죄를 계속 추궁 중에 있으며 이들로부터 불온서적 『한양』지 37권, 『민족의 존엄』 2권, 『세계』, 『군중』, 『문학계』, 『메아리』 등 각 1권, 일화 2만5천3백30엔, 카메라 1대, 녹음기 1대, 라디오 1대 등을 증거품으로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 1974.02.06. 1면; 『경향신문』 1974.02.05. 1면; 『동아일보』 1974.02.05. 1면; 『매일경제』 1974.02.05. 7면; 『중앙일보』 1974.02.05. 7면
이 사건은 ‘문인간첩단사건’이라는 용어로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되었으나, 보안사에서 씌운 간첩혐의는 공소사실에서 사라졌다. 문제가 된 월간지 『한양』은 창간 초부터 한국문단의 저명한 문인들(백낙준, 박종화, 김동리, 모윤숙 등)이 대거 축사나 원고를 보냈다. 조총련자금으로 운영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양』지는 국내에도 수입이 허용되었고 주일한국공보관에도 진열되어 왔었다. 사건 직후 문협 회원 600명 가운데 295명이 대거 석방탄원서에 서명했으며 수많은 문인들이 혐의사실의 근거 없음을 증언했다. 결국 10월 31일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재판장 배석)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 형량이 무겁다는 피고인들의 항소는 이유가 있다”고 판시 이호철과 장병희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던 임헌영은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항소를 기각, 원심 형량대로 선고했다. 이로써 이 사건에 관련됐던 5명은 모두 풀려났다. 『경향신문』 1974년 10.31. 7면
2009년 7월 2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는 “1974년 문학평론가 임헌영씨 등 5명이 간첩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된 ‘문인·지식인간첩단사건’은 개헌지지 운동을 막기 위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의 조작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2009년 07.29.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