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이케다 회담에서 대한국교정상화 촉진
케네디 정권은 이러한 대외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 기반을 확충하려 했으나 1960년대 미국의 국제수지가 한층 악화되는 상황에서 한계가 많았다. 특히 동아시아는 대(對)중국 봉쇄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중남미나 중동에 비해 미국의 관여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이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급증하면서 한국이나 대만에 대한 원조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자연히 이전부터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동아시아의 중심축으로 미국이 기대해 온 일본에 책임분담 압력이 가중되었다. 케네디 정권은 경제부흥에 성공한 일본이 후진국에서 군사적·경제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한정책에서 경제개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일본 자본과 대일 수출시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미국의 한일관계정상화 압력은 1950년대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그 역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 으로 나섰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조속한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 5·16 쿠데타 이후 사태를 관망하던 일본의 이케다 정권은 한일회담 추진이 일본 국내에서 논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6월 20∼21일 미국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총리가 일본의 안전보장과 한국정세를 연계시키고 한국의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이후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미국의 강한 압력과 더불어, 기시 전(前)총리와 같은 자민당 내 우파 세력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5·16쿠데타로 중단된 한일회담은1961년 10월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