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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당, “한일회담 지속하면 난동사태 날 것”
혁신세력의 반대논리는 첫째, 한일협정이 본질적으로 한일군사동맹이며 미국의 비호 아래 일본, 한국,대만을 연결하는 북동아시아 군사동맹(NEATO)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유럽의 NATO에서 시작되어 중동, 동남아시아에 이르고 있는 미국의 집단상호원조 조약망을 극동으로 연장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 한일협정이며, 일본이 NEATO에 편입된다면 한반도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군사적 분쟁에 일본이 말려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이 논리는 ‘미일안보체제’를 부정하고 중립노선을 주장해 온 혁신세력의 대외정책 기본자세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한일협정으로 남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확인시키는 것은 북한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하여 일본과 북한의 수교를 막을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이 완성될 때까지는 양국 어느 쪽과도 정식 국교를 맺지 않고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만 교류를 증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셋째, 한일협정은 경제협력의 명분하에 일본의 독점자본이 대한 경제침략을 획책하고 한국의 저임금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한국을 일본의 경제속국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넷째, 1961·62년 당시는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한일교섭에 반대하였다. 쿠데타로 성립된 불법적, 비민주적 권력인 군사정권이 민주정권으로 교체될 때까지 일본정부는 교섭에 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자민당 내의 친한파와 소위 우파 그룹이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정치, 경제적인 지원을 보이는 것에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냈다.
혁신세력들의 주장에 큰 차이점은 없었으나, 사회당은 ‘적극 중립론’에 입각하여 동북아시아 군사동맹에 의한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 참여 반대를 강조했고, 공산당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논리를 가지고 반미, 반제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그리고 정치투쟁에 중점을 두는 사회당과 공산당에 비해 경제투쟁을 중시하는 총평은 경제문제와 함께 한일문제를 다루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혁신정치세력이 적극적으로 한일회담 반대 태도를 나타낸 것은 1961년 10월 제6차 회담 시작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1962년 김-오히라 회담 무렵에는 혁신세력들이 대규모 통일행동을 하면서 반대운동이 고조되었지만 한일회담의 진전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채 다시 위축되었다. 이후 반대운동세력은 1964년 한국에서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알려지자 한일회담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으며, 1965년에는 한일협정의 군사적 측면을 특히 비판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투쟁목표의 분산화, 혁신세력 내부의 기본적인 태도 차이, 한일협정에 대해 정부·자민당 내부에 두드러진 대립이 없었다는 점 등으로 저조한 투쟁에 그쳤으며,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반대투쟁에 무관심했다.
일본 내 한일협정 반대진영의 논리 역시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현안과 관련된 개별정책에 대한 반대론이 아니었다. 특히 사회당의 경우,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의 청산’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독도문제나 평화선문제에서는 오히려 일본이 국익을 관철시키지 못한 저자세 외교를 했다고 비판함으로써 한국의 반대운동과는 전혀 다른 논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 일본 혁신세력의 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1960년대 안보투쟁의 연속선상에서 1970년 안보조약 파기 투쟁과의 중간에 위치하는 정치투쟁의 성격이 짙었다.
1957년 12월 29일 ‘한일 양국 억류자 상호 석방협정’(1957.12.31. 조인)을 마련한 한일 예비회담에서 억류자 상호 석방 및 본회담 재개에 합의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성명’(1958.1.4.)을 발표하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남조선 당국이 전 조선인민을 대표할 수 없는 것만큼 일본정부가 그와‘대일 재산청구권문제’, ‘재일조선인 국적문제’를 포함한 전 조선인민의 리익에 관련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일방적인 회담을 진행하거나 조치를 강구한다면 그는 완전히 부당한 것이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역시 1951년 1월부터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는데, 그들의 주장은 성명 등 공개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북한정부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이 한일회담을 매우 심각한 현실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강경하게 대처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주선으로 한일회담이 과거와 달리 그 타결을 향해 순항하기 시작하였던 5·16쿠데타 이후였다. 당시는 중소분쟁과 조소갈등으로 북방 3각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한일회담은 북한에 긴장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북한은 한일회담이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려는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며, 일본군국주의의 남한 침략을 비롯하여 한일회담에서 토의되는 모든 내용을 미국이 교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일조약 반대는 곧 미국 동아시아전략에 대한 반대이고, 반미투쟁으로 연결되었다.
한일회담에서 토의되는 의제에 대한 북한의 관심도 일본의 혁신정치세력보다 훨씬 컸다. 특히 주시한 것은 기본관계, 청구권,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문제였다. 이들은 한일회담이 북한을 제외하고 남한 일방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비난했으며, 이 회담에서 일제에 의한 배상, 청산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한편, 조총련은 남한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해서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남한의 반대운동을 ‘반제, 자주통일세력’으로 보았다.
일본에서 사토 내각이 성립한 후 1964년 12월부터는 회담타결을 이끌어 낸 7차 회담이 진행되자 북한은 한일회담 반대를 정부성명 수준을 넘어 전체 사회의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게 되었다.
-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해외 및 북한 196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