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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 청구권 이견 현격(懸隔)

(도쿄 26일발 동화통신) 과거 6차의 한일회담을 통하여 제일 큰 문제점이고 박-이케다 정상회담시에도 최대의 관심사였던 한국의 대일청구권 문제는 아직 쌍방의 견해차이가 현격한데, 대일 청구권 8개 항목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항(구 조선은행을 통하여 일본이 가지고 간 지금(地金) 349톤과 지은(地銀) 57톤의 반환청구) 1909년한일합병부터 1945년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그간에 일본이 가져간 것을 시가로 환산하여 반환할 것을 요구한 데 대하여, 일본 측은 지금 지은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구입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반환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전차(前次)의 일반 청구권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로 양측이 극심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제2항(1945년 8월 9일 현재의 일본정부의 대조선총독부 채무의 변제청구)① 구 통신국 관계의 저금과 채권, ② 9월 9일 이후 일본인의 한국 내 각 은행에서 인출한 예금액, ③ 조선총독부 동경사무소의 재산의 반환 등인데, 이에 대하여 일본은 개인의 저금과 채권의 반제 및 12월 6일 이후 한국내의 은행에서 인출한 예금에 대하여는 반환에 응할 방침이나 그 외는 응하지 않을 태도이다.
▶제3항(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진체(振替) 또는 송금된 금전의 반환청구) ① 조선은행 본점에서 동경지점에 송금된 것, ② 타 재한금융기관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된 것 등인데, 일본은 1945년 12월 6일 이후분에는 응할 태도이나 그전 것은 불응할 태도이다.
▶제4항(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지점 또는 사무소가 있었던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이 요구에 대하여 일본 측은 군령 33호는 한국 내에서만 효력을 가지는 것이며 그 외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려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5항(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징용된 한인의 미불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 ① 일본유가증권, ② 일본계 통화, ③ 피징용 한국인의 미불금, ④ 전쟁에 의하여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금 등인데, 일본 측은 개인분에 대하여만 반환에 응할 방침이라 하며, 박-이케다 회담 후에도 일본 측의 ‘개인청구권 한도’라는 일방적인 왜곡된 보도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제6항(일본의 통치 중 일본국의 관리, 군인 등의 직에 있던 한인으로서 은급 기타 연금 수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에 대한 변제청구) 이것도 제5항과 같은 원칙에서 일본 측은 변제 청구에 응할 태도를 표시하고 있다.
▶제7항과 8항 이 7, 8항은 청구권 문제가 결정된 후에 반제금에 대한 이자, 반제금 지불방법 등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아직 쌍방의 의견일치를 보기 전에는 협의의 대상이 안 되며 최후의 문제이다.
그 외의 문화재의 반환청구와 선박의 반환청구인데, 문화재에 있어서는 ① 일본의 한국통치중 한국에서 일본에 가져간 미술품 등의 반환인데 일본 측은 법률상의 반환의 필요성은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반환의 정당성은 인정하는 단계에 들어가 문화재 전문가 회의 등을 지난주에 처음으로 열고 이 문제의 진전을 보고 있으며 과거 일부 반환에 뒤이어 해결될 전망이 있다. ② 선박의 반환청구는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의 항구에 선적(船籍)이 있었든지 8월 9일 현재 및 그 후 한국영해 내에 정박하였던 어선의 반환을 요구하는 데 대하여, 일본은 청구권의 해석을 법률적으로는 반환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한일우호를 위하여 종전 시 한국의 치적선(置籍船)의 일부를 반환할 것이다 운운”하며 청구권의 내용을 인정해가는 태도이다.『경향신문』 1961.11.26 석1면
8개 항목의 재산청구권 (8개 항목의 대일 요구) 한국정부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대일 강화조약에 한국이 서명국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전제하에 대일배상 및 보상 요구를 제기해 왔으며, 실제로 이를 위한 실무적인 준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작성된 것이 1949년 완성된 ‘대일배상요구조서’이다.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기획처의 기획국 산하에 설치된 대일배상청구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49년 3월 15일 완성된 것으로, 지금, 지은, 서적, 미술품, 골동품, 선박, 지도원판 등의 반환을 요구하는 현물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제2권은 같은 해 9월에 완성된 것으로, 제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제1권의 현물요구를 규정했으며, 제2부는 확정채권, 제3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인적·물적 피해 보상, 제4부는 강제공출에 의한 손해 배상이 그 내용이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이 당초 일본 측에 청구하려고 의도했던 것은 전쟁 배상의 성격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극동정책을 변환하여 일본의 전쟁 책임을 회피시키려 했고, 한국의 강화조약 참가는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국제법상 교전에 따른 패전국의 승전국에 대한 피해보상을 뜻하는 ‘배상’ 방식은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결국 ‘대일배상요구조서’의 내용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그 규모와 항목을 대폭 축소 재조정한 ‘8개 항목의 대일 요구’가 1952년 제1차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1차 회합에 제출되었다.

〈8개 항목의 요구〉
• 제1항-한국으로부터 가져온 고서적, 미술품, 골동품, 기타 국보, 지도원판 및 지금(地金)과 지은(地銀)을 반환할 것.
•제2항-1946년 8월 9일 현재 일본정부의 대 조선총독부 채무를 변제할 것.
•제3항-1946년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이체 또는 송금된 금액을 반환할 것.
•제4항-1946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또는 주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재일 재산을 반환할 것.
• 제5항-한국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 및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인의 미수금, 기타 청구권을 변제할 것.
• 제6항-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 소유의 일본법인 주식 또는 기타 증권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
•제7항-전기(前記)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생긴 과실을 반환할 것.
•제8항-전기(前記) 반환 및 결제는 협정 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늦어도 6개월 이내에 종료할 것.

8개 항목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전쟁 배상의 성격을 최대한 약화시키면서 재정적, 민사적인 채권·채무의 청산요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요구서는 1945년 12월 6일 미군정법령 제33호 제2조와 1948년 9월 20일 발효된 ‘한미 재산 및 재정에 관한 최초협정’, 그리고 대일강화조약 제4조 2항의 규정에 근거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이러한 청구권 요구에 대해 역청구권을 주장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였다. 한편, 당시 청구권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대립에 대해 미국은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직접 개입을 회피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국의 애매한 이중적 태도는 한일 양국이 미국의 입장을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고, 이는 한일회담을 난항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1950년대 내내 지속되었던 미국의 모호한 입장이 적극적 중재로 변화하는 것은 케네디 행정부에 이르러서였다.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출판부, 996, 22~26쪽, 51~58쪽. 박태균, 「한일회담 시기 청구권문제의 기원과 미국의 역할」, 『한국사연구』131, 2005, 50~53쪽. 이원덕, 「한일회담에서 나타난 일본의 식민지지배 인식」, 『한국사연구』 131, 2005, 101~103쪽. 장박진, 「한일회담에서의 피해보상 교섭의 변화과정 분석」, 『정신문화연구』 31-1, 2008, 211~216쪽. 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 선인, 2008, 70~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