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비교연구회 발족
창립선언문에서 이들은 “고립적, 일방적, 전근대식 강의의 맹점을 탈피하고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여 민족사적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한국적 민족주의 관념을 모색, 정립한다”며, 첫째 가능한 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학생운동의 기반을 넓히고, 둘째 연구발표회나 세미나를 통해 학술적 이념적 지표를 확립하며, 셋째 민정이양에 대비한 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정립한다는 활동목표를 제시했다.
이날 초대회장에는 정치과 4학년 이종률이 선임되고 간부에는 박범진(총무부장), 김경재(연구부장), 김승의(기획부장), 권근술(차장급), 성래진(후일의 성유보) 등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공개 운동조직 대신 세미나, 연구발표회, 연구지 발간 등의 활동을 하는 학술단체로서의 성격을 표방하여, 합법적으로 학생운동의 기반을 확대하고 새 방향을 정립하고자 했다. 예컨대 이종률이 발표한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현실’이라는 연구발표회에서는 군부통치 아래 파시즘적 성향을 띠는 경향을 비판했고, 김경재와 현승일이 발표한 ‘민족의 개념’ 정립에 관한 세미나에서는 남북통일의 주제가 선명히 부각되는 식이었다.
민비연 학생들은 민족주의, 특히 한국의 후진성과 분단의 책임을 강대국 정치와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에서 찾으려는 제3세계 민족해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일회담반대투쟁 시작 당시 민비연 학생들의 지향은 3·24시위 때 나온 서울대 문리대의 선언문과 결의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자본이 민족자본을 침식, 예속시켜 매판자본화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고 하여 신제국주의라는 시각에서 한국이 처한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했다.
민비연의 학생들은 이후 한일회담반대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비민주적 행위를 규탄하는 항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비연은 1965년 9월 16일 정부에 의해 공식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