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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고려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비판

5일 하오,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 수상자인 장준하사상계〉사 사장은 고대학생총회가 마련한 학술사상 강연회에서 “우리에게 없는 것은 정책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라며, 박정희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박정희대통령선거 당시 벌였던 윤보선 후보와의 사상논쟁에서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는데, 그것이 민족주의 정치노선을 상징하는 담론으로 인식되면서,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얼마 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 과정에서 거대한 분노로 바뀌게 된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돌베개, 2008, 386쪽) 한편 민주주의라는 말에 ‘민족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후퇴라는 비판도 많았다. 형용사는 대개의 경우 어느 정체를 모호하게 하는 수단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항녕, 「신악론」, 『사상계』, 1964년 6월호, 56쪽)가 4·19에서 결실된 한국민족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며, “독재와 국제적 고립을 초래하는 민족주의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날의 김종필 강연에 이은 이날의 강연에서 “호사한 호텔 창가에서 샹송을 듣고 짓는 눈물 속에 민족주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감상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3.11.6 석2면. 이는 장준하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한 최초의 언급이었다.(오오타 오사무, 「한국에서의 한일조약 반대운동의 논리」, 『역사연구』 제9호, 2001년, 187쪽) 함석헌도 11월 11일 연세대학교 학생회가 주관한 강연회에서 “군사정부가 ‘민족’이란 말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의 자유사상을 짓누르기 위한 복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홍승면, 「박정권의 민족주의란?-불투명하고도 모호한 김종필 씨의 발언과 몇 가지의 문제점」, 『사상계』, 1963.12,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