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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와대에 집결 무장병력과 대치중 최루탄 20발 발사

25일 오후, 서울의 각 대학 및 중고생 약 30,000명은 24일의 서울대·고대·연대 시위에 이어 다시 대일굴욕외교를 규탄하여 시내를 휩쓸고, 일부는 청와대에서 수도경비사 무장병력과 맞서 실랑이를 벌였다. 교통이 마비된 세종로 연도에는 열띤 학생들의 구호에 호응,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의 흥분한 얼굴로 꽉 들어찼다고 신문들은 보도했다.
이날 아침 경찰의 저지 없이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시위에 돌입한 연세대(약 3,500명), 한양대(약 4,000명), 중앙대(약 2,000명), 건국대(약 3,000명), 경희대(약 1,000명), 동국대(약 3,000명), 외국어대(약 500명), 배명, 성동, 수송 등 각 중고교생(약 2,000명)들은 정오를 지나서부터 국회의사당 앞에 차례로 합류하여 구호를 외치다가 하오 1시 30분경부터 일제히 청와대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와대 앞에서 완전무장한 2개 중대와 경기도 응원경찰대의 삼엄한 저지선에 부딪쳐 오후 3시 현재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경비대는 20여 발의 최루탄을 발사했다. 중앙청에서 적선동을 거쳐 효자동에 이르는 길은 약 2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이들 학생 데모대들은 청와대 앞에서 박 대통령에게 직접 한일회담 즉각 중단과 대표단 소환을 호소하고자 했다. 학생대표로 경희대 총학생회장 이건환(법과4년)군과 동국대 총학생회장 김실(농과 4년) 군이 하오 2시 40분 “박대통령을 만나겠다”고 나서 정 서울시경국장은 이들을 엄 내무장관과 만나도록 했다. 엄 내무장관은 이들은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갔는데 박 대통령은 만나지 못하고 이후락 비서실장을 만났다. 학생들은 이 실장의 “학생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는 확약을 받고 나와 하오 3시반 경희대, 동국대 학생들은 스스로 철수했다. 그러나 외국어대, 수송전기공고생들은 계속 남아 구호를 외쳤다.
▶25일, 서울 문리대생 500여 명은 “구속학생 즉시석방”, “매판자본가를 타살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하오 1시 20분 교문을 출발, 원남동 로타리를 돌아 종로4가에 이르자 때마침 동대문서에 구속되었던 교우 30명이 전원 석방되어 함성을 올리며 이들 법대생 200명과 합류, 약 1,000명으로 늘어난 채 종로로 행진하다가 민정당사 앞에 이르렀을 때 격려해주는 민정당원에게 야유를 던지며 적·흑·녹·청으로 된 깃발을 높이 들고 화신백화점 로터리를 돌아 을지로 입구에서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미 대사관 앞을 통과할 때 “미국은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 쪽으로 나아갔다.
이들 문리대와 법대 데모대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옆에 신축 중인 뉴코리아호텔 앞에 이르자 “일인 침입자본의 상징”이라며 “일본 재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5~6명의 대표가 뛰어 올라 간판을 떼어 10여 명의 학생이 메고 의사당 앞에 던졌다.3·24시위 이후 학생들은 시위과정에서 빈번히 일본인 상사원들이 주재하고 있는 반도호텔과 일본자본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 뉴코리아호텔로 몰려가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도를 규탄하였다. 학생들은 이처럼 한일회담의 타결로 귀결될 한일 간의 경제적 관계를 국내 매판자본이 일본의 독점자본과 결탁하는 차원에서 파악하였다.(홍석률,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6·3운동」, 『근현대사강좌』 제6호, 1995, 128쪽)하오 3시 10분경 학생대표 3명은 이효상 국회의장을 만나겠다고 요청했다.3월 25일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새세대』 196441 3면 참조
▶25일, 중앙대생 약 2,000명은 12시 반에 교정에 집합, “정부는 한일 저자세 굴욕외교를 즉시 중단하고 평화선을 끝까지 사수하라”라는 6개 조항의 결의문을 채택, 선언문 낭독이 있은 후 데모에 들어갔는데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경찰백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시내로 들어왔다. 하오 4시 현재 중앙청 앞에서 1,000여 명의 중앙대생들은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한일회담의 무조건 반대와 최두선 총리의 회견을 요청했다.
▶25일, 낮 12시20분쯤 한양대생 약 4,000명은 “후손의 번영을 위해 대일굴욕외교를 즉시 중지하라” “여야정치인은 다 같이 자숙하라”는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학교를 나서 아무런 저항도 안 받고 경찰의 경호 아래 시종 평화적 행진을 계속, 하오 1시40분쯤 국회의사당에서 다른 대학생들과 합류,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 청와대와 효자동 사잇길이 학생 시위대로 가득 차자 한양대 학생들은 중앙청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수도육군병원 앞으로 행진, 2시 15분에 팔판동 청와대 뒷골목에 이르러 무장경찰 100명, 곤봉 든 경찰 200여 명과 대치했다. 하오 3시 5분경 일부 학생들이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려고 했을 때 현장에 나와 있던 수도경비사 소속 군인들이 최루탄 5발을 발사하여 제지했다. 이때 한양대 이영화(건축 3년), 이경주, 임문용 등 7~8명이 머리에 중상을 입었다. 투석전이 벌어진 3시 20분쯤 약 700명의 배명고교 학생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한양대와 합세했다. 또한 3시 30분에는 한양고교 학생 300명이 합류했다.
▶25일, 경희대에서는 오전 11시 반 6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매국적 회담 즉시 중지”, “매국노 김종필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즉시 물러나라”, “감금된 학생 석방”, “대일외교 내용공개”, “한국특사의 소환” 등 5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정오부터 시위에 들어갔는데, 시조사 앞에서 경관 50여 명의 저지를 받았으나, 경희대생들과 동국대생들은 하오 1시 10분경 종로4가에서 합류, 질서정연하게 종로 길을 거쳐 화신 앞에서 을지로 입구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동국대는 남대문~시청으로 돌았고 경희대는 미 대사관 앞을 거쳐 시청 앞 광장에서 연좌했다. 이에 앞서 동국대생 5,000여 명은 교내 강당에서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플래카드를 들고 낮 12시 반 교문을 나오며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 100만 학도는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구국의 선봉에 서라!” “잊었나 36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퇴계로~을지로를 거쳐 종로로 향했다. 동국대생들은 시청 앞에서 경희대생과 다시 합류, 같이 의사당으로 몰려갔다.
▶25일, 감리교신학대학 학생 100여 명도 하오 2시 5분경 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하오 2시 25분 수송전기공고생 3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의사당에 모였다.
▶25일, 연세대 학생 3,500여 명은 오전 11시 반 교내 야외집회장에서 총학생회를 연 끝에 한일굴욕외교 성토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 박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과시키고 시위에 돌입, 150명의 ROTC학생을 선두로 조를 짜고 교문을 나서 서대문으로 향했다. 이들은 하오 1시 32분 의사당 앞에 도착하여 국회의장을 만나자고 요구했다. 하오 2시 25분 이효상 의장이 나와 “제군이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국회도 나라를 사랑한다. 여러분의 주장을 바르게 관철토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내가 구체적인 대답을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학생들은 “굴욕외교 즉각중지, 망국재벌의 처단, 김종필 즉각소환 등을 확답하라”고 버티었다. 이 의장은 “그렇게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대답했으며, 하오 2시 45분 이 의장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했다. 학생집행부의 결정에 따라 연세대생들은 하오 3시 해산했다. 그러나 학생들 중 일부는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
▶25일, 외국어대학생 300여 명도 12시 반 학교에 모여 하오 1시부터 교문을 나서 시위에 돌입했으며, 건국대 학생 3,000여 명도 같은 시각에 교정에서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돌입, 모두 세종로에 집결,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동아일보』 1964.3.25 석1·7면, 『경향신문』 1964.3.25 석1·3면 ▶25일, 건국대생들 2,000여 명은 상오 11시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마치고 굴욕외교를 즉각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국회의사당을 거쳐 하오 3시 중앙청을 지나 청와대 입구로 밀려들었다.
▶25일, 서울대 농대생들은 낮 2시 반경 500여 명이 시위에 들어가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들어 대일굴욕외교반대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계속했다.
▶25일, 고려대생들은 하오 3시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및 집행부 모임을 갖고 24일 감행된 대일굴욕외교반대 데모에 대한 사후보고와 정부와 학생대표와의 모임에서 퇴장한 경과를 듣고 한일회담의 전적인 책임은 공화당과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임에서 학생회 간부들은 만약 우리의 주장이 관철이 안 될 경우에는 4·19 이상의 정당한 불만이 나타난다는 최종적 메시지를 박 대통령과 정부 및 국회에 28일 내로 전하기로 하고 만약 이 건의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26일 상오 10시 반 5,000명 전교생이 대대적인 시위를 할 것임을 결의했다.
▶25일, 이화여자대학교는 일본 어선의 평화선 침범을 지키기 위한 경비정을 위한 조선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경비정 모금운동 선언문 우리는 지금 현실을 직시합니다.
우리들은 주권을 가진 여성국민으로서 스스로 용감히 이 변화해가는 역사의 대열에 서기를 다짐합니다.
작은 땅덩어리 한국을 밑천 삼아 놀부 놀음을 하고 있는 일본에게 또다시 상업을, 공업을, 아니 우리의 생활을 맡겨버린다는 것에 우리는 슬픔의 이를 갑니다.
값싼 영수증에 36년을 써내려온 고통의 일기장을 내어줄 수 없고, 쓰다버린 고깃배 몇 척과 이 나라의 해변을 지키는 우리 동포어부들의 밥줄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이익과 긍지와 또 생명을 내어주는 원한 드높은 회담이 결코 이 시기에 이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는 보장은 무엇입니까?
양심과 애국심의 표현 앞에 국민의 정치는 마땅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하며 천심이 지시하는 대로 가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데 용감함이 지성인의 본 자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 우리는 우리들의 나라와 국민을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합니다.

1. 정권의 유지를 위해 도매식 흥정을 서두르는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1. 이 나라의 보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
1. 우리는 평화선 경비선박의 조선모금 운동에 솔선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우리의 자세를 굳게 지켜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1964년 3월 25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2~4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