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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 16개 도시로 확대 30여 학교, 데모 나흘째 계속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연 나흘째 계속, 27일에도 전국 16개 도시의 30여개 대학 및 중고교생들전국 15개 도시 45개 대학 및 중고교생이란 의견도 있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6월호, 299쪽) 32,900여 명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날의 전국 시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 영등포고 900명, 보인상고 800명, 동국전공고 1,300명, 휘문고 1,000명, 동국무선고 1,000명, 서울대 상대 1,000명, 명지중고 500명, 용산공고 1,000명
27일 상오 국회의사당 앞이나 세종로 네거리는 산발적으로 지나가는 일부 고교생들의 구호가 메아리칠 뿐 격돌은 없었는데, 대기경찰도 연 나흘째 지칠대로 지쳐 데모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이날 상대생의 “자수하라 삼분폭리”라는 플래카드가 이채로웠다.
1,000여 서울대 상대생들은 전날인 26일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 내용인 한일회담 계속 추진을 지시하는 훈령과 데모 중지를 호소한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상오 11시 “4·19의 핏자국이 가시기 전에 우리 학도가 궐기하게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 지성인으로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좌시할 수 없다”는 선언문과 “매판자본을 몰수하라.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취소하고 평화선을 사수하라”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그들은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백지화”, “친일 악질재벌의 배격” 등의 구호를 외쳤다. 상대생들은 교문을 나서면서 비밀외교를 만천하에 공개할 것을 촉구하는 뜻으로 저고리를 뒤집어 입고, 종로를 거쳐 12시 35분 반도호텔 앞에서 “일본 상사 물러가라”고 15분간 시위했다. 이들은 “자수하라 삼분폭리”,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분쇄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일부 정치인의 유흥적 낭비를 일소하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에게 이를 돌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호텔 앞에서 충무로의 신도호텔 쪽으로 옮긴 시위대는 “미쓰비시 대리점 물러가라”, “듣기 싫다 사요나라, 아리랑을 불러보자”고 외쳤다. 시위대는 하오 2시경 중앙청 앞에서 해산했다.
한편 정부당국은 이날 상오 지프차를 동원, 주요 가도에 박 대통령의 담화문이 실린 삐라를 뿌리며 마이크로 학생들의 자숙을 외치기도 했다.
27일 상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든 보인상고 500명은 “한일회담 대표단 즉시 철수하라”, “우리 경비정의 쾌속을 바란다”, “매판자본 타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영등포고는 “36년간의 압박 부족하더냐”, “경찰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중앙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던 명지고교 남녀학생 500여 명은 하오 1시 50분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 경기도청 앞에 두 겹으로 쳐놓은 철조망 바리케이트 8개를 넘어뜨려 끌고 가는 순간 무장경찰 50명의 곤봉세례를 받았다. 학생들은 투석으로 이에 응수, 재무부 앞까지 물러섰는데 이 충돌로 5~6명의 학생이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또한 이를 취재하던 기자 1명이 경찰에 포위되어 곤봉과 구둣 발로 차여 상처를 입었다.
그 밖에도 휘문고, 동국무선, 동국전공고, 명지중고, 고명상고, 교통고교생 등 모두 5,200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가를 누비며 구호를 외쳤다.
▶광주 27일 상오 9시 반 사레지오 중고교생 1,500여 명은 한일굴욕외교반대 데모에 나서 “김종필씨를 즉각 소환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도청 앞에 이르러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천안 27일 상오 9시 20분 천안고교, 천안공고, 복자여중생 등 2,000여 명은 대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인천 27일 상오 10시 송도중고생 1,200명은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춘천 27일, 춘천농대생 400명과 춘천고생 1,500명은 시청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였다.
▶수원 27일 상오 11시 수원고교생 800여 명이 굴욕외교반대 시위를 했다.
▶청주 27일 상오 10시 청주대 300여 명과 교육대 250명, 청주고 1,400명, 청주상고 1,600명, 청주농고 90명 등 5,000여 학생이 “친일외교자 김종필을 즉각 소환하라”, “곤봉은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가 되라” 등 구호를 외치며 11시 반 도청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목포 27일 상오 11시 반에 문태고교생 600명은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곳 고교 대표들은 공고에 모여 학생들이 취할 태도에 관해 회의를 했다. 목포고, 목포공고, 목포상고, 목포여고, 실업고, 문태고교 학생 약 5,000명은 하오 1시 역전 광장에 모여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국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주 27일 10시 전주고생 1,500명, 전주공고 1,500명, 전주농고 1,100명, 전주상고 1,300명, 신흥고교 1,000명 등 5개교 6,400명은 전북도청광장에 집결하여 “소환하자 매국노 김종필” 등구호를 외치고 삐라를 살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진주 27일, 해인고 650명, 진주고 1,200명이 시위를 벌였다. ▶충주 27일 상오 11시반 충주공업초급대학, 실업고, 충주고, 충주여고 등 2천여 학생들은 시내 중앙로터리에서 한일회담 반대 궐기대회를 열고 시위에 들어갔다.
▶안성 27일, 안법중고 800명이 시위를 벌였다.
▶부산 27일 상오 10시 40분쯤 부산진구 소재 혜화여고생 약 1,500여 명은 수업을 중단하고 평화선 사수의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시위에 앞서 “우리는 야당의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선언문도 채택했다.『동아일보』 1964.3.27 석1면·3면, 『경향신문』 1964.3.27 석1면·3면, 『전남매일신문』 1964.3.28 3면, 『부산일보』 1964.3.27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