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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4주년 기념식 전국 각처에서 거행 한국학생총연합회에서는 시국선언문 채택

19일, 4·19 네 돌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상오 10시 일제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정부 주최 기념식이 시민회관에서, 한국학생총연합회한국학생총연합회(한학련)는 1963년 11월 서울 시내 32개 대학의 학생회장들이 모여 교내 학생운동에서 교외 학생운동으로의 확산을 위해 조직체를 갖기로 합의한 데서 시작되었다. 12월 ‘한학련 발기인총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경비는 독지가 로부터 받은 후 차후에 갚을 것과 종합대학 5명, 단과대학 3명의 비율로 대의원 총회를 열 것을 합의했다. 이후 1964년 3월 대의원총회에서 총회 준비 및 사무실 유지비 15만 원이 공화당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내부에서 논란이 되었다. 한학련은 이처럼 초기부터 정치성 개입과 헤게모니 쟁탈 등 잡음과 난관 속에서 1964년 3월 중순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각 대학의 총 학생회장들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멤버는 서울대 정정길, 고려대 구자신, 연세대 안성혁, 성균관대 송영삼, 경희대 이건환, 동국대 김실, 한양대 이정재 등이었다. 그러나 한학련은 대중집회보다 회장단의 집단행동으로 정국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사를 표명하는 활동을 주로 전개함으로써 학생연합단체로서의 성격이 불투명했고, 실질적으로 학생들의 여론을 집약, 반영하는 대표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20쪽. 이재오, 『한일관계사의 인식Ⅰ-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 학민사, 1984, 222~223쪽) 한국민주화운동사와 6·3학생운동사에서는 한학련이 미발족 조직으로 나오나, 이재오는 64년 3월 결성된 조직으로 기술. 신문기사에서 한학련이 실재하는 조직처럼 여러 번 보도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결성된 것으로 보았다. 『대학신문』 6월 29일에는 결성단체로 설명.(『대학신문』 1964.6.29 7면)에서 주최한 독자적인 기념식이 시청 앞에서 각각 열렸다. 시청 앞에서는 17개교 남녀대학생 1,000여 명경향신문에는 12개 대학, 2,000여 학생들로 보도되었으며, 『6·3학생운동사』에는 5,6개 대학, 3,000여 명으로 기술되었다.(『경향신문』 1964.4.20 석6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99쪽)이 모여 시청 앞 분수 옆에 4·19기념탑을 세우기로 결의, 곧 전국학생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학생들은 이자리에서 세계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조국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체의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요지의 4·19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경향신문』 1964.4.20 석6면, 『동아일보』 1964.4.20 석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