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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에서 학생들 시위

19일, 시청 앞에서 4·19 4주년기념식을 마친 ‘한국학생총련’ 소속 학생들은 “부패와 부정이 싹트고 있다. 4·19의 피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외치며 시위에 돌입했고, 하오 12시 30분 경찰의 저지를 받아 끝내 돌팔매질과 최루탄 발사 소동을 일으켰다.
1,000여 명경향신문은 학생 수가 2,000여 명이라고 보도하였다.(『경향신문』 1964.4.20 석6면)의 학생들은 식을 마친 후 청와대 쪽으로 향하다가 세종로 상공부 앞에서 중앙청까지 6겹의 방위선을 친 경찰대와 충돌, 약 2시간 동안 승강이를 벌였다. 이때 동국대 경찰행정과 2년 최영보(23) 등 수 명이 경찰봉에 맞았다. 흥분한 학생들은 경찰봉을 뺏는 등 소동을 벌이다가 중앙청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 종로3가, 을지로, 미 대사관 앞 코스를 밟아 낮 1시 20분 시청 앞에서 해산했다.
한편, 1시 50분 건국대, 성균관대생 약 400명은 상공부 앞 경찰 제1저지선을 뚫고 중앙청 쪽으로 향했는데, 경찰은 제3저지선에서 최루탄 40여 발을 쏘았다. 건대생 약 300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 돌진하여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으며, 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이에 홍순갑(20) 등 10여명의 건대생이 중경상을 입었고, 박용권(23 건대 4년) 등 6명의 학생은 경찰에 연행되었다.동아일보에는 “1시 40분 세종로 상공부 앞길에서 기동경찰과 계속 대치하고 있던 건대생 150여 명은 경찰 저지선의 돌파를 다시 기도, 혼란이 벌어지자 돌팔매질을 하였고, 경찰이 발사한 20여 발의 최루탄 세례를 받았다. 이에 건대 농대생 김홍근 등 7명이 연행되었다.”고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64.4.20 석7면)
흩어진 학생들은 다시 대오를 짜고 경찰 저지선에 접근, 연행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현장에 달려온 건대 총장의 권고로 하오 2시 20분쯤 일단 해산했다. 연행된 학생은 곧 석방되었다.『경향신문』 1964.4.20 석6면, 『동아일보』 1964.4.20 석7면
한편 서울대 문리대의 현승일 등은 한일굴욕외교반대투위 방송차에 타고 가두방송을 하다 연행되었다. 이 차에는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일장기를 손에 쥐고 뛰는 만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날 부산에서도 4,000여 명이 데모를 하였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