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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YTP(청사회) 정체와 학원사찰의 진상 폭로

23일 하오부터 서울대 문리대생 200여 명은 교내 4월혁명기념탑 앞에 모여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고 소위 YTP조직의 정체와 학원사찰의 전모를 폭로했다. 동 학원사찰조사위는 이날 성토대회에서 YTP를 비롯한 사이비학생단체의 정체 및 모 부의 학원사찰 내용을 적은 5개 항목 4,000여 자에 달하는 유인물을 학생들에게 돌렸으며, 송철원(정치과 4), 손정박(정치과 4)은 폭로내용이 사실임을 학생들 앞에서 증언했다. 그간 직접 조사에 나섰던 조사위학생들은 폭로 내용이 모두 YTP회원들의 반성 자백에 의한 것이며, 이들은 각기 자신이 폭로한 내용에 서명 날인한 확인서를 제출, 지금 조사위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성토에서는 ① 37개 사이비 학생단체는 즉시 자진해체하라. ② 공화당은 자금제공을 즉시 중지하고 공개 사과하라. ③ 학교당국은 학원사찰 방지에 솔선수범하라. ④ 정부는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⑤ 위 4개 항의 결의를 실행하지 않을 경우 2~3일 내에 실력행사에 돌입한다는 결의를 한 후 4시 20분쯤 해산했다.
조사위 학생들에 의하면 학원 내에 당국의 심한 사찰의 손이 뻗치기 시작한 것은 5·16 초기부터, 학원 내 음모단체의 실마리가 보이게 된 것은 지난해에 동 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김모(무직) 씨가 별다른 용무 없이 학원 내에 자주 드나들고 후배들과 빈번히 접촉, 이유 없는 생색을 내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위의 김 씨가 정보부원이라는 사실을 후배 누구나 다 알게 되었으며, 자연히 그와 자주 접촉을 갖는 사람, 또는 재학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총이 쏠리기 시작, 학원사찰조사위는 이들을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헛정보를 주기도 하는 등 온갖 수단으로 확실한 기미를 포착, 주로 친우로서의 인간관계와 젊은이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마침내 이들의 고백과 함께 YTP학원사찰 전모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YTP회원으로서 이번에 사실을 폭로한 학생은 5~6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YTP의 입회원서, 서약서, 신상명세 카드까지 조사위에 제공하였다. 폭로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요약) 1. YTP에 관하여=일명 청사회(靑思會)라고 약칭되는 이 단체는 지난해 7월 24~25일 발기대회를 갖기 전까지는 소위 문명퇴치라는 미명을 내건 비밀테러단체였다. 발기대회 후 양성화된 이 단체는 남대문 근처 금마차 다방 상층에 총본부를 두고 문에 ‘갑피516’이라는 암호를 쓰고 있으며, 사용전화는 ⑧84XX로서 관계자 외에는 통화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YTP의 1개 위원회는 50명 이상으로 조직되나, 서울의 경우는 30명으로 가능했다. 공식예산은 서울위원회에서 월 1만 원 정도의 자금을 받는다.
“일체의 비밀은 생명을 걸고 엄수하며 배신을 할 때는 생명을 바친다. 생명을 걸고 복종한다”는 등 무시무시한 내용의 입회서약을 하기 때문에 회원들은 탈퇴가 곤란하다. 조사위에 의하면 문리대 안에는 30명 내외의 회원이 있으며, 미대·법대로 확장되려는 찰나 사회여론의 악화로 당분간 주춤하고 있었다.

2. 학원사찰 및 사이비학생조직·학원분열획책=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이 대학출신 김모(재학 당시 학생위원장)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생들을 유혹, 일종의 서약서를 받은 다음 월 2,000~3,000원씩의 정보비를 제공, 학원동태를 보고하도록 했다. 정보부와 관계를 맺었던 C군의 증언에 의하면 지난 3월 18일에도 학생데모의 기미를 탐지, 그가 중앙정보부에 연락하여 사전에 좌절되었다. K군(4년)도 2,000원 이상을 위의 김으로부터 받았으며, 이 밖에도 김의 지시에 따라 시위대의 위치, 인원수 등을 중앙정보부에 수시로 연락하였다.
문리대 내에만도 모 정당의 후원을 받는 사이비학생단체가 37개나 있으며, 특히 그중 ‘한국사회연구회’는 발기회비조로 공화당으로부터 20만 원(액수 확인)동아일보 보도에는 20만 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선인, 2006, 126쪽에는 30만 원으로 기술되어 있다.을 제공받았으며, 그 후에도 지방 각도 조직비로 도당 6만 원씩을 받았다. 이 단체간부들은 대통령선거 직전 금수장호텔에 4~5회 투숙한 일이 있다.
또 모 부원은 문리대 내 기성단체에 대항하여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좌절시키는 경우, 논공행상조로 해외유람을 시켜준다는 제의까지 한 일이 있다. 이 대학 4년 H군에 의하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 5만 원짜리 수표 제시, 조선호텔에서의 향응, 해외유학 알선 약속 등 갖가지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경향신문』 1964.4.24 석3면, 『동아일보』 1964.4.24 석3면. 송철원은 언론이 중앙정보부와 YTP를 동일시하거나, 동급으로 보아 YTP를 과대평가하는 한편, 중앙정보부의 학원공작을 간과하는 과오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날 발표된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 내용 중 송철원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분은 ‘정보부원 김덕창에 의한 학원사찰’이었는데도, 언론은 보도의 시선을 전적으로 YTP쪽으로 돌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철원, 「YTP(청사회: 靑思會)」, 『기억과 전망』 26, 2012, 336~341쪽)
YTP(靑思會)YTP는 ‘청년사상연구회’의 영문 Youth Thought Party의 약자로 간단히 ‘청사회’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일본 극우단체의 이름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송철원, 「YTP(청사회: 靑思會)」, 『기억과 전망』 26, 2012, 311쪽) 민주공화당은 1963년 10월 15일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를 당선시키기 위해 등록된 청년단체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비밀단체인 MTP이름은 ‘문맹퇴치회’로 활동기간은 1961.5.16~1963.7.24이다.를 청년사상연구회(청사회)로 이름을 바꿔 1963년 7월 25일 결성대회를 통해 등장시켰다.결성대회 때는 ‘YTP’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청사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둘을 혼동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송철원, 「YTP(청사회: 靑思會)」, 『기억과 전망』26, 2012, 319쪽) 이어 8월에 민주공화당은 청사회를 공식 청년단체로 내세우려고 했지만, 공화당 내부의 반발과 언론 및 야당의 비판에 직면하여 무산되었다. 그러자 박정희 진영은 9월 28일 ‘전국청년단체총연맹’이라는 단체를 급조하고, 친여단체를 단일화한다는 명분으로 청사회를 그 산하단체로 끼워 넣었다. 이렇게까지 청사회를 비호했다는 것은 박정희 진영이 이 조직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청사회는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결성대회를 명분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YTP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10월 5일 민정당 윤보선 대통령후보는 선거유세에서 최초로 YTP를 거명하며 공격했고, 이어 10월 11일 김영삼 민정당 임시대변인도 이 조직의 전모를 공개했다. 비밀단체란 비밀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생명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정체가 폭로되자 YTP는 힘을 잃게 되었다.
1964년 3월 하순경 서울대 문리대 송철원은 같은 학교 졸업생 김덕창이 중앙정보부원으로서 이미 대통령선거 때부터 학원공작을 펼치고 있음을 감지하고 손정박, 이영섭, 최해용, 최무웅과 함께 3·24시위를 주도한 문리대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 산하에 ‘학원사찰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송철원은 뜻밖에 YTP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YTP의 기관지 『향지』를 비롯해 YTP서울특별시위원회 회의록, 입회원서, 신상명세카드, 서약서, 훈련교본 등의 문건을 입수했다. 아울러 김덕창의 중앙정보부와는 다른 라인에서 문리대에 프락치 조직이 있음을 파악하는 부수적 성과도 거두었다. 송철원은 조사를 마무리한 후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23일 서울대에서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YTP는 1963년 10월 5일 윤보선에 의해 존재가 폭로되어 사실상 몰락했고, 이 성토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 사살되었다.
송철원은 1964년 5월 20일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후 늦은 밤 중앙정보부로 납치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는 ‘장례식’을 주도했던 김중태 등 동료들의 피신처를 알아낼 목적과 함께 중앙정보부의 학원사찰을 폭로한 데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YTP는 MTP의 이름만 바꾼 것으로, 기본 성격은 동일했다. 따라서 MTP가 교육용 지침서로 발간한 『향지』를 통해 이 단체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격, 조직
『향지』 제1권에 수록되어 있는 ‘문맹퇴치회 운영요강’에서 MTP는 비밀결사임을 밝히고, 입회할 때에는 KKP 시절과 마찬가지로 “① 회의 교육, 훈련활동 등 일체의 비밀은 생명으로 엄수하며 배신할 때에는 생명을 바친다. ② 명령은 생명을 걸고 절대 복종한다.” 등의 선서를 반드시 하도록 규정했다.
‘회의 운영목적’은 “....군사혁명의 공약을 우리의 공약으로 확인하고, 이 민족의 마지막 운명을 건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최전위대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불도저가 됨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7대 원칙’은 1. 우리들은 비밀결사이다. 1. 회원을 엄격히 심사하여 소정의 훈련을 거친다. 1. 반공투쟁의 전위에 선다. 1. 군사혁명정부가 천명한 공약 실천에 적극 노력한다. 1. 본회가 해산되기 전까지는 사망 이외는 탈퇴를 불허한다 등을 명시하였다.
‘조직원칙’에서는 “① 민주적인 중앙집권으로 종적인 낙하산식 비상조직을 한다. ② 조직 구분은 회별, 도별, 학교별로 하되 기본 단위는 동·리로 하고 행동단위의 구성인원은 5인조로 한다”고 규정했다.YTP는 민정이양 전까지는 회원자격을 정회원, 준회원, 평회원으로 구분하고, 정회원은 4,500명을, 준회원은 2만 명을, 평회원은 8만 명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밖에 수에 제한이 없는 세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민정이양 후 등록사회단체로 발족한 후에는 형식상 회원의 자격구분을 철폐하였다. 회원수는 1964년 현재 7만 명으로 공언되고 있었다. 기구조직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상은 모든 권력이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소위 ‘종적 낙하산식’인 ‘비상조직체계’는 KKP 및 MTP 당시나 YTP로 개칭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으며, 정점을 점하고 있는 인물들의 면모에도 변동이 없었다.(김원기, 「YTP(靑思會)」, 『신동아』, 1964년 10월호, 185~186쪽)

(2) 교육, 훈련
MTP는 『향지』의 교육내용에 있는 ‘5·16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회원교육과정의 제1’로, ‘군사혁명을 지지하여야 할 의의’를 ‘회원교육과정의 제2’로 삼아 먼저 세뇌교육을 시행하였다. 세뇌교육을 완료한 후, 일반적 내용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과 함께 특수교육에 들어갔다.
교육의 최종과정은 ‘정보수집교육’이었다. 이 교육의 개요는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출처, 비밀활동의 원리, 비밀연락 방법, 상대방의 역정보 수단 등이었다.
MTP의 핵심들은 특수교육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미행법, 접선법, 와이어 타는 법, 교살법, 교살을 자살로 가장시키는 법, 접선이 탄로났을 때 안전을 유지하는 방법(중간인을 처치하는 방법) 등’이었다.
교육을 받은 회원은 상호 신분을 밝히는 것이 금지되고 반드시 가명이나 암호를 사용하게 했다. 인가된 사항 외에는 회원 상호 간 의사소통이 금지되고, 질문도 금지되었다.

(3) 활동
교육과 훈련을 받은 회원들의 제1차적 의무는 정보활동으로 『향지』의 운영요강 제31조에 규정된 내용에는 국민의 혁명정부에 대한 여론과 요망, 혁명정부의 구체적인 시책에 대한 여론, 반혁명음모, 반국가적 행위, 선거에 대한 여론 및 준비사항 등이 있다.
이들은 모든 연락을 종적으로 해야 했고, 어떠한 경우에도 횡적 연락은 엄금되었으며, 암호문을 사용하였다.
YTP의 조직은 날로 확장되어 서울 시내 9개 종합대학, 37개 단과대학과 각 지방대학에까지 조직을 펼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정보활동뿐 아니라 대통령선거운동 등 정치활동에까지 손을 뻗쳤는데, 이러한 대통령선거전은 ‘독수리작전’이라 명명되어 정치활동 재개 훨씬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김원기, 「YTP(靑思會)」, 『신동아』, 1964년 10월호, 184~190쪽
송철원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YTP를 지원한 중앙정보부의 고위층은 누구였고, 언제부터였으며, 지원한 자금은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여 프락치 역할을 했는지 등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송철원 「YTP(청사회: 靑思會) 『기억과 전망26 2012, 319~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