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YTP(청사회) 정체와 학원사찰의 진상 폭로
이날 성토에서는 ① 37개 사이비 학생단체는 즉시 자진해체하라. ②
조사위 학생들에 의하면 학원 내에 당국의 심한 사찰의 손이 뻗치기 시작한 것은 5·16 초기부터, 학원 내 음모단체의 실마리가 보이게 된 것은 지난해에 동 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김모(무직) 씨가 별다른 용무 없이 학원 내에 자주 드나들고 후배들과 빈번히 접촉, 이유 없는 생색을 내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위의 김 씨가 정보부원이라는 사실을 후배 누구나 다 알게 되었으며, 자연히 그와 자주 접촉을 갖는 사람, 또는 재학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총이 쏠리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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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비밀은 생명을 걸고 엄수하며 배신을 할 때는 생명을 바친다. 생명을 걸고 복종한다”는 등 무시무시한 내용의 입회서약을 하기 때문에 회원들은 탈퇴가 곤란하다. 조사위에 의하면 문리대 안에는 30명 내외의 회원이 있으며, 미대·법대로 확장되려는 찰나 사회여론의 악화로 당분간 주춤하고 있었다.
2. 학원사찰 및 사이비학생조직·학원분열획책=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이 대학출신 김모(재학 당시 학생위원장)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생들을 유혹, 일종의 서약서를 받은 다음 월 2,000~3,000원씩의 정보비를 제공, 학원동태를 보고하도록 했다. 정보부와 관계를 맺었던 C군의 증언에 의하면 지난 3월 18일에도 학생데모의 기미를 탐지, 그가 중앙정보부에 연락하여 사전에 좌절되었다. K군(4년)도 2,000원 이상을 위의 김으로부터 받았으며, 이 밖에도 김의 지시에 따라 시위대의 위치, 인원수 등을 중앙정보부에 수시로 연락하였다.
문리대 내에만도 모 정당의 후원을 받는 사이비학생단체가 37개나 있으며, 특히 그중 ‘한국사회연구회’는 발기회비조로 공화당으로부터 20만 원(액수 확인)
또 모 부원은 문리대 내 기성단체에 대항하여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좌절시키는 경우, 논공행상조로 해외유람을 시켜준다는 제의까지 한 일이 있다. 이 대학 4년 H군에 의하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 5만 원짜리 수표 제시, 조선호텔에서의 향응, 해외유학 알선 약속 등 갖가지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YTP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10월 5일 민정당 윤보선 대통령후보는 선거유세에서 최초로 YTP를 거명하며 공격했고, 이어 10월 11일 김영삼 민정당 임시대변인도 이 조직의 전모를 공개했다. 비밀단체란 비밀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생명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정체가 폭로되자 YTP는 힘을 잃게 되었다.
1964년 3월 하순경 서울대 문리대 송철원은 같은 학교 졸업생 김덕창이 중앙정보부원으로서 이미 대통령선거 때부터 학원공작을 펼치고 있음을 감지하고 손정박, 이영섭, 최해용, 최무웅과 함께 3·24시위를 주도한 문리대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 산하에 ‘학원사찰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송철원은 뜻밖에 YTP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YTP의 기관지 『향지』를 비롯해 YTP서울특별시위원회 회의록, 입회원서, 신상명세카드, 서약서, 훈련교본 등의 문건을 입수했다. 아울러 김덕창의 중앙정보부와는 다른 라인에서 문리대에 프락치 조직이 있음을 파악하는 부수적 성과도 거두었다. 송철원은 조사를 마무리한 후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23일 서울대에서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YTP는 1963년 10월 5일 윤보선에 의해 존재가 폭로되어 사실상 몰락했고, 이 성토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 사살되었다.
송철원은 1964년 5월 20일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후 늦은 밤 중앙정보부로 납치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는 ‘장례식’을 주도했던 김중태 등 동료들의 피신처를 알아낼 목적과 함께 중앙정보부의 학원사찰을 폭로한 데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YTP는 MTP의 이름만 바꾼 것으로, 기본 성격은 동일했다. 따라서 MTP가 교육용 지침서로 발간한 『향지』를 통해 이 단체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격, 조직
『향지』 제1권에 수록되어 있는 ‘문맹퇴치회 운영요강’에서 MTP는 비밀결사임을 밝히고, 입회할 때에는 KKP 시절과 마찬가지로 “① 회의 교육, 훈련활동 등 일체의 비밀은 생명으로 엄수하며 배신할 때에는 생명을 바친다. ② 명령은 생명을 걸고 절대 복종한다.” 등의 선서를 반드시 하도록 규정했다.
‘회의 운영목적’은 “....군사혁명의 공약을 우리의 공약으로 확인하고, 이 민족의 마지막 운명을 건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최전위대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불도저가 됨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7대 원칙’은 1. 우리들은 비밀결사이다. 1. 회원을 엄격히 심사하여 소정의 훈련을 거친다. 1. 반공투쟁의 전위에 선다. 1. 군사혁명정부가 천명한 공약 실천에 적극 노력한다. 1. 본회가 해산되기 전까지는 사망 이외는 탈퇴를 불허한다 등을 명시하였다.
‘조직원칙’에서는 “① 민주적인 중앙집권으로 종적인 낙하산식 비상조직을 한다. ② 조직 구분은 회별, 도별, 학교별로 하되 기본 단위는 동·리로 하고 행동단위의 구성인원은 5인조로 한다”고 규정했다.
(2) 교육, 훈련
MTP는 『향지』의 교육내용에 있는 ‘5·16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회원교육과정의 제1’로, ‘군사혁명을 지지하여야 할 의의’를 ‘회원교육과정의 제2’로 삼아 먼저 세뇌교육을 시행하였다. 세뇌교육을 완료한 후, 일반적 내용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과 함께 특수교육에 들어갔다.
교육의 최종과정은 ‘정보수집교육’이었다. 이 교육의 개요는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출처, 비밀활동의 원리, 비밀연락 방법, 상대방의 역정보 수단 등이었다.
MTP의 핵심들은 특수교육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미행법, 접선법, 와이어 타는 법, 교살법, 교살을 자살로 가장시키는 법, 접선이 탄로났을 때 안전을 유지하는 방법(중간인을 처치하는 방법) 등’이었다.
교육을 받은 회원은 상호 신분을 밝히는 것이 금지되고 반드시 가명이나 암호를 사용하게 했다. 인가된 사항 외에는 회원 상호 간 의사소통이 금지되고, 질문도 금지되었다.
(3) 활동
교육과 훈련을 받은 회원들의 제1차적 의무는 정보활동으로 『향지』의 운영요강 제31조에 규정된 내용에는 국민의 혁명정부에 대한 여론과 요망, 혁명정부의 구체적인 시책에 대한 여론, 반혁명음모, 반국가적 행위, 선거에 대한 여론 및 준비사항 등이 있다.
이들은 모든 연락을 종적으로 해야 했고, 어떠한 경우에도 횡적 연락은 엄금되었으며, 암호문을 사용하였다.
YTP의 조직은 날로 확장되어 서울 시내 9개 종합대학, 37개 단과대학과 각 지방대학에까지 조직을 펼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정보활동뿐 아니라 대통령선거운동 등 정치활동에까지 손을 뻗쳤는데, 이러한 대통령선거전은 ‘독수리작전’이라 명명되어 정치활동 재개 훨씬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송철원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YTP를 지원한 중앙정보부의 고위층은 누구였고, 언제부터였으며, 지원한 자금은 어느 정도였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여 프락치 역할을 했는지 등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