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한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 주최로 열려

20일 오후 2시, 한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5월 15일 비공식 학생조직인 ‘한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학총련)가 결성되었다. 학총련은 각 대학의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과 소속 학생들이 연합한 조직으로, 그 구성원들은 3·24데모 이래 대체로 온건한 경향을 띤 총학생회를대신하여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유영렬, 「6·3학생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한국사연구』88, 1995, 146쪽)(회장 김중태) 주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및 성토대회”가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학생 3,000여 명과 시민 1,000여 명동아일보에는 예상보다 훨씬 적은 1,5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고 보도(『동아일보』 1964.5.20 석1면)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학생 측은 이날 아침 결의문, 격문, 선언문, 조사 등을 프린트해서 각 대학에 돌린 후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성토대회를 서둘렀다. 주동 학생들은 학교 구내 ‘새세대’사 안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는 검은 관과 죽장, 유인물들을 만들었다. 대회장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사망”이라는 조기 1개가 서고, 수개 대학에서 보내온 플래카드들이 있었다.
장례식은 검은 양복에 건을 쓴 4명의 학생들이 죽장을 짚고 검은 관을 어깨에 메고 서 있는 가운데, 송철원(서울대 문리대 4년)은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는 조사를 읽었고, 박동인(동국대 투쟁위원장)의 선언문 낭독, 민승(건국대 대표)의 결의문 낭독이 있었다.
대회장은 최루탄과 곤봉으로 장비한 100여 명의 경관들이 정문 앞 좌우에서 경비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은 장례식을 마치고 5·16이념, 민생고, 한일회담, 학원사찰 등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는 각 학교 대표가 분담하여 진행하였다. 이들은 성토대회가 끝나자 하오 3시에 검은 관을 메고 교문을 나서서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을 하며 데모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전에 볼 수 없이 열띤 일반 시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1,000여 명의 시민들과 미대앞까지 진출했는데, 100여 명의 무술경관과 200여 명의 곤봉을 든 경관이 몰려와 관과 만장을 부수고 학생들에게도 곤봉세례를 가했고, 54명서중석의 글에는 학생 54명, 민간인 8명이 연행되었다고 되어 있다. (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07쪽)이 강제 연행되었다. 이후 경찰의 최루탄 공세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대학가 여기저기에서 농성,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대가 미대 구내에 밀려들어갔을 때, 학교 담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관에게 투석을 하자 최루탄과 방독면으로 무장한 50여 명의 경찰관이 학교 안에까지 들어와 강의실을 포위하고 그중 3, 4명이 강의실에 난입, 수업 중이던 학생을 억지로 끌어내어 구타, 강제연행하려는 것을 말리던 교수의 뺨을 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후 시위대는 이화동 3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최루탄 발사, 연행, 투석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고등학생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하였고, 학생들은 경찰간부도 포함한 10여 명의 경관들을 연건동 골목집에 몰아넣어 연금하는가 하면, 영업용 트럭을 빼앗아 돌을 싣고 종로5가 쪽까지 나아가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6시 30분쯤 동원된 무술경찰대의 철저한 해산작전으로 기세가 꺾여 하오 7시 40분쯤 해산했다.
경찰은 데모에 참가했던 학생, 시민 중 13명에 대해서 시위 및 집회에 관한 법률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의 영장을 발부받아 서울교도소에 수감했다. 경찰은 21일 안으로 107명에 대한 영장을 신청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영장이 발부된 13명 가운데 11명은 학생, 2명은 민간인이다. 한편, 경찰은 연행된 민간인 가운데 섞여 있는 모 정당원 약 10명에 대해서는 선동여부와 배후관계를 추궁할 것이라고 한다.
이날 데모로 인해 시위대 50여 명, 경찰관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아울러 경찰은 공보부와 시경 공보계 방송차 및 일반 차량 등 22대의 차량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다.『경향신문』 1964.5.20 석1면, 석3면. 『동아일보』 1964.5.20 석1면, 석7면, 『동아일보』 1964.5.21 석7면. 『새세대』 1964.5.27 3면,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01~104쪽, 260~264쪽.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5월 초부터 준비된 것으로, 서울대 현승일은 민비연을 찾아온 동국대 박동인과 함께 한일회담반대데모의 서울대-동국대 연합전선 구축을 합의하고, 몇 차례의 회합을 가졌다. 처음에는 장례식 날짜를 박정희의 쿠데타일인 5·16으로 잡았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5·20으로 재확정하고 각 학교 대표자들도 선정했다. 5월 16일 저녁에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5개 학교 투위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 준비를 최종 점검하고 역할분담을 논의하였다.(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260~261쪽) 이전까지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투쟁이 학교별로 진행된 것과 달리, 이날의 집회는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이 함께 참여한 연합집회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17쪽)
서울대학교 5·20 선언문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조국은 지금 민족적 전통의 이 거센 물결 속에서 우리의 과감한 투쟁을 갈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통감하고 우리 대학사의 자랑찬 전통을 계승하여 ‘빈익과 부자유 그리고 외세의존’의 참담한 현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민족적 양심의 깃발을 올린다. 4월의 항쟁은 민족사적 전진을 위하여 누적되어 온 정치, 경제, 사회적 제모순을 지양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민족적 주체의 확고한 정립, 외세에 의존 기생한 민족반역 체제의 제거와 그리고 반봉건적 사회경제구조의 청산을 위한 거룩한 투쟁이었다.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세력,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민족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이었다. 5월 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군사정권은 권력으로 민족적 양심세력의 단초적 맹아를 삭제했고 사회 전반에 걸친 독재적인 기본권의 유린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살했으며, 사리와 사욕·부정과 부패·조작과 날조 등 모든 악의 요소를 잉태한 채 파멸의 길로 질주하고 있다.
경제적 민주자유를 외치는 정부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대중에게 실업, 기아임금, 살인적 물가고를 선물하면서 매판적 반민족자본의 비만을 후원하였다.
민주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의 과학적 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는 수렵적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행상적 탈춤으로 분장되었고 굶주린 대중의 감각적 해방을 위한 독화의 미소를 띠었다.
국제협력이라는 미명하에서 우리 민족의 치떨리는 원수 일본 제국주의를 수입하여 대미의존적 반신불수인 한국경제를 이중예속의 철쇄에 속박하는 것이 조국의 근대화로 가는 첩경이라고 기만하는 반민족적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우리는 전 민족의 양심이 이러한 반역적 범죄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오늘의 이 모든 혼란이 외세의존이 아닌 민족적 자립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외세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체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쇄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민족적 긍지를 배반하고 일본 예속화를 촉진하는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
우리의 지성과 양심은 민족이익에 역행하는 어떠한 기만도, 왜곡된 논리에도 증오와 거부를 계속할 것을 선언한다. 이러한 우리의 투쟁은 민족사의 전진적 승리를 쟁취하고 말 것임을 확신한다.
1964년 5월 20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6~467쪽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선언문 5·16을 성토한다.
지금부터 3년 전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일군의 청년장교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혁명’을 공문으로 시달하고, 온갖 화려한 형용사로 된 혁명공약, 갖은 환상을 나열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비롯한 각종 계획을 발표하고 모든 사회정의와 민족정기를 혼자 독점하면서 ‘세대교체’, ‘체질개선’, ‘재건’, ‘인간개조’, ‘민족적 주체성’, ‘민족적 민주주의’ 등 온갖 고귀한 말을 남발하였다. 그러고는 군사혁명정부와 그의 정책에는 한마디의 비판도 용서하지 않는 철저한 장막을 쳤다. 그로부터 3년, 무비판의 뒷장막에서 온갖 화려한 계획과 공약 뒤에 도사리고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모골이 송연한 공포정치와 수도방위사령부 등의 총칼의 보호를 받으면서 너무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역사적 퇴보’를 이 나라 민족사에 강요하였다. 수많은 아름다운 약속을 해온 3년, 5월 군사혁명 장교의 정부는 약속한 것 중의 어느 하나도 이룬 것이 없으며, 약속의 정반대의 것은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너무나 엄청나게 저질러놓았다. 이제 그들의 놀라운 범죄사를 그들의 혁명공약 6개 항목에 따라 들추어보자.

1.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 형식적이며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반공의 미명을 빙자하여 1,000여 명의 민족적 양심세력을 용공분자로 몰아 옥석의 구별도 주저 없이, 서대문 감옥으로 인도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이 사상적으로 의심받자 야당은 이승만식의 매카시적 수법을 쓴다고 통박하였던 그들이 어린 학생에게 불온삐라가 든 소포를 날려보내고 공산당으로 몰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도 한마디 해명도 못 하고 있다. 괴소포를 보낸 자는 누구이고, 이를 잡아내지 못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누가 과연 ‘매카시’의 수제자이고 이승만식의 신경질적 관제날조적 반공을 정책의 상투수단으로 하고 있는가. 더욱이 그들은 반공의 최대 무기인 자유의 가치를 무시했으며 공산주의의 온상인 빈곤을 이 땅 곳곳에 확대해 놓았다. 이것이 그들이 만든 반공태세의 재정비요 강화다!

2. “국제협약을 준수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한다.” 그들은 이제 ‘적극외교’, ‘대국적’, ‘거시적’, ‘실리적’ 외교를 표방하면서 일본과의 찰떡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일본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의 쇠사슬에 꼭 묶으려는 한·일굴욕회담을 강행하고 있다.

3.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참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하루아침에 고관대작·대기업의 사장이 된 청년장교들은 그들의 왕성한 정력에 비례하는 무한한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산같이 쌓인 ‘구악’ 위에 더욱 크고, 더욱 악취 나는 ‘신악’을 만들었다. 사직공원 불하를 비롯한 온갖 부정부패, 독직 사건을 보라! 또한 그들은 혁명동지 간의 피나는 권력투쟁 끝에 혹은 서대문 감옥으로, 혹은 외국으로 쫓겨났고, 그들의 사랑하는 꽃 ‘사쿠라’는 정치인, 학원, 이 민족 모두를 세대, 출신, 신과 구등으로 분열시켜 놓았다. 학원사찰과 분열공작은 가장 악랄한 예이며 워커힐은 국제적 퇴폐주의의 물질을 한강에 넘실거리게 하는 국민도의 민족정기 진작의 표본이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그들의 온갖 계획과 약속이 있은 지 3년, 물가는 70퍼센트가 올랐고 국민소득은 세계 최하위 40불이 되었다. 민생은 기아선상에서부터 아사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물가고, 실업, 기아임금을 농민·노동자·소시민에게 강요하면서 이들 전체 국민의 피눈물 위에 소수 반민족적 매판성 악덕재벌과 벼락감투의 배를 불렸다.

5. “국토통일을 완수할 실력을 배양한다.” 그들이 배양한 실력은 기만과 부정과 부패의 천재적인 교활한 실력밖에 없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이처럼 철저한 거짓말은 역사상 있은 적이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혁명공약을 성취할 이념도 능력도 없었으니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며 전 국민의 비웃음 속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1961년 5월 16일부터 8월 12일, 1963년 2월 18일, 2월 27일, 3월 16일, 4월 8일 이른바 수많은 ‘번의’와 표변을 보라. 정치를 예술이라 하지만 이보다 더한 곡예를 본 일이 있는가?

화폐개혁, 환율개정, 농촌고리채정리 등 졸렬무정견한 경제정책과 새나라, 빠찡꼬, 오토바이, 교포재산반입, 증권파동 등 갖가지 부정사건으로 총파탄에 이르는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자의 배설물로 주무르려 발악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의 더러운 배설물로 한국경제가 자립된다는 거짓말을 강변하고 있다.
부패, 무능, 독성 부정 등 온갖 독소는 터질 때를 기다리며 화농해 있다.
반민족적 탄압, 기만, 부정, 무능, 부패 정부에 양심적 국민은 무엇을 선사할 것인가.
1964년 5월 20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7~469쪽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결의문 1.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적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단하라!
1. 농민·노동자·소시민의 피눈물을 밟고 서서 홀로 살쪄만 가는 매판성 악덕재벌을 처형하고 몰수하라!
1. 5·16 이래의 온갖 부정, 부패사건을 자진 폭로하고 그 원흉을 조사 처형하라!
1. 학원사찰을 비롯한 온갖 민족분열공작을 자진폭로, 그 총지휘자를 처형하고 반공, 방첩에 전력을 경주하라!
1. 5월 군사정부는 5·16 이래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극악의 경제난, 민족분열, 굴욕적 한·일회담 등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에 부쳐라!
1. 5·16 이래 구속된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라!
1. 우리들 민족적 양심의 학생과 국민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피의 투쟁을 계속하려 한다.
민족의 양심인 전국대학생, 그리고 애국시민이여, 온갖 화려한 약속 뒤에 도사리고 갖은 부패와 부정,독선을 자행한 자는 누구인가!
단군 이래 최고의 물가고와 기아임금을 농민, 노동자, 소시민에게 강요하면서 소수의 매판성 악덕재벌을 살찌게 한 자는 누구인가!
총파탄에 이르는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으려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피로써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에 묶는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거짓말을 하는자 -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 지내자!
영원히 잠들게 하자!
1964년 5월 20일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69~470쪽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 조사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놓았다.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는 시체여! 지금도 풍겨온다. 강렬하게 냄새가 지금 이 순간에도 충혈된 사냥개들의 눈으로부터 우리를 엄습한다.
시체여! 죽어서까지 개악과 조어와 전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賤才)요, 절대의 졸작이었다.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의 번의를 번의하여 권태감의 흥분으로 국민정서를 배신하고, 부정불하,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빠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며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퇴폐를 증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도의를 고취하고 경제를 재건한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 손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는 또한 뉴코리아의 무수한 유리창에서 체질마저 개악하였다. 어둡고 괴로웠던 3년 전 안개 낀 어느봄날 새벽, 네가 3천만 온 겨레에게 외치던 귀에도 쟁쟁한 그 역사적인 절규를 너는 벌써 잊었는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던 공약 밑에 너는 그러나 맨 먼저 민족적 양심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그때 이미 우리는 알았다. 너 죽음의 저 야릇하게 피비린내 감도는 낌새를 우리는 보았다. 죽음으로, 죽음으로만 향한 너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우리는 들었다. 우리에게 정사를 강요하는 너의 맹목적이고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목소리를, 그리고 우리는 맛보았다. 극한의 절망과 뼈를 깎는 기아의 서러움을.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주의여! 석학의 머리로서도, 천부의 의감으로서도 난해하기만 한 이즘이여!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절망과 기아로부터의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몰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무엇이더란 말이냐? 말하지 않아도 좋다. 말 못 하는 시체여! 길고 긴 독재자의 채찍을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 때리고 넘어진 너, 누더기와 악취와 그 위에서만 피는 사쿠라의 산실인 너. 박의장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의 본질은 곧 안개다!
어느 봄날 새벽의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너, 안개여, 너는 안개 속에서 살다가 안개 속에서 죽은, 우유부단과 정체불명과 조삼모사와 동서남북의 상징이요, 혼합물질이었다. 한없는 망설임과 번의,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이처럼 황당무계한 소위 혁명정신으로, 이같이 허무맹랑한 이념의 몰골을 그대로 쳐들고서 공약을 한다. 재건을 한다.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고리채 어쩌구, 5개년계획에 심지어 사상논쟁까지 벌이던 그 어마어마한 배짱은 도시 어디서 빌려온 것일까? 그것은 ‘덴노헤이카’에서 빌린 것이 분명하다. 일본군의 그 지긋지긋한 전통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한국군 구조의 바닥에 아직도 허황한 권력에의 미망과 함께 문제의 그 배아를 길러낸 것이다.
시체여! 고향으로 돌아가라! 너는 이미 돌아갔어야만 했다. 죽어서라도 돌아가라, 시체여! 우리 3천만이 모두 너의 주검 위에 지금 수의를 덮어주고 있다. 들리느냐? 너의 명복을 비는 드높은 목소리, 목소리,목소리들이 이미 죽은 네 육신과 정신으로 결코 반공도 재건도 쇄신도 불가능하다는 저 민족의 함성이 들리지 않느냐? 저 통곡이 들리지 않느냐? 가거라! 말없이 조용히 떠나가거라! 그리하여 높은 산골짜기를 돌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라, 시체여! 하나의 어리디어린 생명을, 꽃분이, 순분이의 까칠까칠 야위고 노오랗게 부어오른 그 얼굴을, 아들의 공납금을 마련키 위해 자동차에 뛰어드는 어떤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결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5월 16일만의 민족적 민주주의여!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의 이 새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가거라! 시체여! 돌아가거라! 이제 안개가 걷히면 맑고 찬란한 아침이 오리니 그때 너도 머언 하늘에서 북받쳐오르는 기쁨에 흐느끼리라. 일찍 죽어 복되었던 네 운명에 감사하리라!
그러나 시체여!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지금 거기서 네 옆 사람과 후딱 주고받은 그 입가의 웃음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대량검거의 군호인가? 최루탄 발사의 신호인가? 그러나 시체여!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목메도록, 뜨거운 조국과 너의 최초의 악수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입술가에 변함없이 서리는 행복의 미소인 것을.
시체여!
1964년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0~473쪽.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당선된 박정희 정권을 직접 겨냥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이 장례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투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몇몇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번 집회가 학생 총의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집회 참석 인원도 주최 측은 최대 3만 명까지 예상했으나, 실제 참가한 인원은 훨씬 적었다. 심지어 일부 학교에서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규탄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감을 반영했다. 민비연을 비롯한 장례식 추진 학생들은 일찍부터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많은 학생들의 기대감을 의식하여 반대의 대상을 민족적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박정희 정권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날의 장례식을 통해 드러난 학생들의 인식 차이는 이후 학생과 박정희 정권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점차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418~4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