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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32개 대학생 대표들,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 개최

25일, 전국 대학생들이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를 강행하였는데, 각 학교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 25일, 서울대 학생들은 문리대 구내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 모여 낮 12시 20분부터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를 열었다. 문리대, 약대, 법대, 미대 등 본부 부근 단과대학생 약500명『동아일보』 1964.5.25 석1면, 『동아일보』 1964.5.25 석7면, 『경향신문』 1964.5.25 석1면. 한편 참여학생 수에 대해 동아일보는800명(1면), 500명(7면)으로 경향신문은 500명(1면)으로 보도이 모인 대회장에는 “학원의 자유를 사수하자”, “구속학생 및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폭력 정치집단은 자폭하라”는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다수의 사복 경찰관이 눈에 띄었다.
이날 대회는 혁명기념탑 앞에 무릎을 꿇고 묵념을 올림으로써 시작,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법대 학생회장 이양희는 “친진보, 반보수... ”운운의 문제된 구절이 있는 구국비상결의문을 그대로 낭독, 대회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낮 12시 55분쯤 대회를 마친 후 박영호(외교 4) 등이 “지성이여 단결하라, 양심은 반항한다, 일주일 유예는 참을 수 없다”고 외치자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 시위에 들어갔다. 학생 약 50명은 교문을 나와 “배고파 못 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 “구속된 학생,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5가를 향해 행진 중, 데모 학생 수는 약 300명으로 불어났고 시민 약 200명도 가세하였다. 경찰은 처음에 아무 반응이 없다가 1시 20분쯤 종로5가 로터리와 효제국민학교 앞에 집결, 대비태세를 취했다.
종로5가까지 오는 동안 시민 전부와 대부분의 학생들은 흩어지고 문리대, 법대생 약 50명만 남아 경찰 저지선에 걸리자 연좌데모를 시작, 약 5분 동안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새로운 자세로 임하라”, “무저항으로 투쟁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종로5가와 미대 앞 양쪽에 대기 중이던 경찰에 포위되어 전원 연행되었다.
구국비상결의선언 민족의 5천 년 역사를 왜곡되게 하느냐 정의와 자유의 힘으로 3천만 민족의 운명을 봉건, 외압, 독재, 신식민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느냐 하는 국가 초비상시 우리 전국 청년학도는 다음과 같이 결의 선언한다.
1. 현 위정자는 5·16 이후 감행된 수많은 부정부패 행위를 철저히 규명하여 국민 앞에 사죄하라.
1. 신성한 학원을 침입한 경찰은 즉각 파면하고 관계책임자를 즉시 엄단하라.
1. 새벽에 법원을 강간한 일부 무법 ‘테러’군인과 관계책임자를 즉시 엄단하라.
1. 구속 중인 애국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1. 파국에 직면한 민생고 타개는 망국 독점매판재벌의 엄단 몰수로부터 출발하라.
1. 정치자금을 양성화하는 입법조치를 하라.
1. 위험천만한 비상시국을 조성하는 과장포고나 무근거한 과정선동을 지양하라.
1. 진정한 학생의 외침이 퇴폐타락한 구정객들이나 몰지각한 일부 정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며 여하한 이들의 편승도 규탄, 타도할 것이다.『경향신문』 1964.5.25 석1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3쪽. 이 선언문에서 제5항의 ‘친진보 반보수’라는 구절이 문제 되었는데, 그 부분은 삭제된 채 보도되었다. 제5항은 원래 “친진보 반보수의 거센 4·19, 3·24 열풍에”라는부분이 ‘국시’에 위반된다고 경찰에서 학생대표를 연행·조사하기도 하였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신동아』, 1985년 6월호, 309쪽)
행동강령 오늘 우리는 민족의 진보와 번영을 위한 혁명대열의 전위임을 재차 확인하면서 전국학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행동노선을 천명한다.
1. 오늘 우리의 총궐기는 백만 학도와 3천만 민족의 절실한 요구임을 확신한다.
1. 우리의 행동은 헌법수호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하에 무질서한 파괴활동 행위가 아님을 명시한다.
1. 오늘의 행동은 전국대학생의 공동의사와 공동행위의 결의임을 선포한다.
1. 오늘 우리의 행동에 편승하려는 여하한 당파도 이를 배제하고 규탄한다.
1. 금주 내에 우리의 의로운 주장이 관철될 획기적 전기가 이룩되지 않을 때는 4·19정신으로 실력투쟁도 불사할 것을 천명한다.
1964년 5월 25일『경향신문』 1964.5.25 석1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3~474쪽. 『6·3학생운동사』에는 선언문과 행동강령의 날짜가 5월 21일로 되어 있으나, 결의 선언 두 번째의 군인 법원 난입사건이 21일 새벽에 있었고, 『동아일보』 5월25일자 1면에 이 선언문과 행동강령이 실린 것으로 보아, 5월 25일의 오기인 것으로 추정된다.(편집자)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 선언문 4·19정기가 조국사에 던진 민족적 희망이 확고한 민주지도체제를 구현치 못했다는 어쩔 수 없는 퇴영의 역사는 비합법적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탈취의 합리화를 결과했으며, 또다시 각성과 자체 성장을 망각한 오늘의 난국을 역산(逆産)하여 우리를 이 광장에 끌어냈다.
바야흐로 5·16쿠데타에서 ‘강요된 민족의 기대’마저 ‘강요된 복종’으로 추락하게 되었으며, 4월의 정신은 유치한 기만과 간악한 조작 속에서 원점을 하회하게 되었으며, 현 이 사회의 저류에는 이글거리는 위기의 지열이 극한계를 달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도 현존 한국의 제 정치세력들은 정권쟁취를 위해서 상호 테러에 혈안이 되어 있고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여하한 치사스런 결단도 불사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시대착오와 방향감각의 상실을 탓하기 전에 3·24궐기 이래 모든 방향에서의 투쟁을 한곳에 집중시켜 떳떳한 자세로 솔직한 우리의 주장을 선언하려 이 광장에 다시 섰다.
지난 2개월간에 잔혹한 탄압과 무시를 당하면서 좌시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우리는 숱한 주장과 경고를 계속해왔다. 우리는 현 국정자나 일부 몰지각한 반민족적 경제인들로부터 민족사의 올바를 정립을 위한 획기적 변환과 혁신을 갈망해왔다. 허나 사태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배신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기만과 허구만이 떠돌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해 온 우리 대학의 지성은 문제의 핵심이 굴종과 체념의 토양에서 외세에 의한 국토양단의 쓰라린 민족사에 비롯되어, 계속 민족의 단결과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민주화로의 자체 능력을 스스로 마손시키고 있음을 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의 정치권력과 무모한 투쟁을 능사로 하지 않는다.
하나, 보라!
오늘 우리의 현실은 엄숙한 민족의 대열에 가공할 기반을 씌우고 감연한 추진력의 원천마저 박살하여 문제의 핵심을 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민족의 절규를 저버린 대일굴욕외교, 독점자본의 무분별한 횡포! 법치주의를 전복하는 통치주의의 만행! 조국의 자유와 양심의 심장인 학원 내의 테러리즘!
이 모든 비민주적 현상들이 오늘의 위기를 도출하는 구체적 요소들이 아닌가? 정의에 철하고 진리에 명한 우리 대학의 지성은 오늘의 사악과 불의를 솔직히 파헤쳐 올바른 조국사의 진정한 길로 열고자 한다.
조국의 주인이 누구요, 주권의 소재가 어디인데, 민족의 절규와 감정을 외면한 채 민생고 해결에 완전 실패한 나머지, 고갈된 국가경제 긴급 미봉책으로 신제국주의를 자초하는 반민족적 만행이 정치귀족의 탁상에서 계속 강행되고 있지 않는가?
여기 민족의 주장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민족 기만주의’로 착각하여 묵시적 위협과 과잉의욕만의 독재정치로 정권유지를 강행하려는 인상을 과감히 탈피함에 있다. 막연한 피해의식에서가 아닌 과학적 비판의식에서 비롯한 국민의 우려는 오늘의 와해된 경제질서 속에 저자세, 굴욕만의 결산으로 투입되는 일본 자본이 신제국주의의 시장화, 예속화의 결과를 초래한 점이다.
대중의 굶주림에 반비례하여 악질정치세력과 결탁한 독점자본가들은 계속 소비성향만을 병적으로 높여 중산층을 파멸로 이끌고, 나약한 중소기업에 10여 년 간의 악랄한 테러를 감행해왔다.
더구나 부정부패 관료귀족들은 저들 악덕재벌들의 방패가 되어 이 사회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이끌고 있지 않는가?
여기에 우리는 현 시점의 마지막 정비단계에서 이들 ‘부정부패관료’들을 과감히 발본색출하여 엄단할 것을 천명하는 바이며 저들 파렴치한 독점자본을 즉시 해체하여 민생고 해결과 중산계급의 건전한 발전을 기할 것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오늘의 이 위기 앞에 하나 더 대공방위에 전력하여야 할 총검이 국민의 최후의 보루인 사법권을 위협하여 민주국가의 근기를 뒤흔들었다. 이 천인공노할 사실 ‘총검은 합리화’된지라, 역사적 논리가 정립되더니 드디어는 ‘통치주의’의 신봉자들에 의하여 정의의 척도가 되는 총검이라는 의식이 이 땅에 만연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전 민족의 함성 속에 절규한다. 이들 망국적 난동분자들을 즉시 처단할 것이며, 더 이상 국민의 엄숙한 기본권이 유린되지 않도록 확고한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다. 위정자들을 규탄하는 행동이 민주사회의 특권이 아님을. 하나, 허위의 기만에 의해 좌석을 차지한 정치세력은 오늘의 난국타개책으로 오히려 신성한 학원의 양심을 분열시키고 학원의 간판을 정쟁의 도구화, 정보정치의 대상화하여 드디어는 신성한 아카데미즘의 전당을 정치사찰의 마당화하지 않은가? 도시 대학의 솔직한 양심의 소리가 ‘역사상 졸렬한 회유와 협박’에 그쳐본 예가 있는가? 여기에 어두운 이면에서의 유치한 조작보다 획기적인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고 밝은 광장에서 대학의 건전한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이 모든 위기의 요소들이 일소될 것을 오랫동안 요구했고, 오랫동안 기다렸다. 더 이상 부정적 모든 현실이 이 시점을 기해 긍정적 발전으로 이행되지 않는 이상 조국과 민족은 영원한 비극을 자초하리라.
우리는 재차 확신한다. 일체의 독선과 방향감각의 상실을 탈피하여 우리의 모든 절규가 민족 대도의 획기적 정비를 강력히 요구함이며 현 체제의 재편성을 하여 마지막 시정을 총체적 집약적으로 주장한다.
우리는 이 나라의 지성임을 자부한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망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절규, 우리의 궐기는 엄연히 민족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1964년 5월 25일 건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전북대학교 서라벌예술대
경희대학교 중앙대학교 국학대학교 서강대학교
고려대학교 한양대학교 국제대학교 시립농대
동국대학교 동아대학교 단국대학교 서울여대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덕성여대 수도여사대
숙명여대 충남대학교 동덕대학교 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 청주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신학대
홍익대학교 가톨릭의대 외국어대 국민대학교
수도의대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4~477쪽. 『6·3학생운동사』에는 국민대학교가 누락되어 31개교이다. 국민대학교의 참가 여부는 동아일보를 참고했다. 경향신문에서는 수도의대를 포함하여 33개교에서 선언문을 채택했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964.5.25 석1면)
▶동국대 25일, 낮 1시 40분부터 동국대 학생 1,000여 명동아일보에는 500여 명으로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64.5.25 석7면)은 동교 중앙강당에 모여 민주주의 및 민권수호 궐기대회를 열고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날 상오 동교 총학생회장 김실이 종로서에 연행되자 성토대회를 열기로 결정, 강당입구에 “잡아다 어쩔 텐가, 어서 석방하라”, “정부는 폭력을 즉시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해산했다.『동대신문』 1964.5.29 1면 동국대 선언문 1. 미대 침입 경관을 엄단하라.
2. YTP 폭로자의 린치사건을 규탄한다.
3. 사법부에 침입한 무장군인을 엄중 처단하라.
4. 5·20데모 주동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5. 순수한 학생과 국민의 여론을 존중하여 정책에 반영하라.『동대신문』 1964.5.29 1면
▶고려대 25일 정오, 운동장에서 대회를 시작, 약 1,2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는데, 개회사(정치4, 김중석), 선언문 낭독(정치4, 박정훈), 결의문 낭독(영문4, 최경식), 기조선언문 낭독(법4,이경우)의 순서로 대회가 진행되었다. 낮 12시 40분쯤 궐기대회를 마치고 성토대회에 들어간 학생들은, 지금 데모의 원인은 민생고에 있으므로 “경제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경제사범을 엄중 처단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사법부 침입 군인들을 “근무지이탈죄”로만 다스리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성토했다.
1시 5분쯤 대회를 모두 마친 고려대생들은 그들의 주장이 관철될 전기가 마련될 것인지 두고 보기 위해 이날은 데모를 하지 않기로 하고 해산, 1주일 후에 데모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서울대 미대 25일, 하오 2시 약 150명동아일보에는 250명으로 보도되었다.(『동아일보』 1964.5.25 석7면)의 서울대 미대생들은 ‘야만경찰학원난입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5·20데모 때 경찰이 미대 강의실에 몰려들어 학생을 구타, 연행하고 이를 말리던 교수까지 폭행, 욕설한 것을 규탄했다. 규탄대회가 끝나고 데모에 나섰던 학생들은 종로5가에서 경찰기동대에 포위되었는데, 미대 난입 경찰의 직속상관이 데모현장에 나와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곤봉을 앞세우고 남학생 80여 명을 연행했다. 여학생들은 하오 4시 30분쯤부터 교정에 다시 모여 “연행된 학생 전원을 석방하라”, “정당한 요구를 관철키 위한 학생들의 정당한 행위를 짓밟은 오늘의 사태에 즉시 사과하라”는 플래카드를 교문에 걸고 연좌,8시 40분쯤 연행되었던 남학생들이 모두 풀려나 학교로 돌아오자 해산했다.
▶경희대 25일, 경희대생들은 상오 11시 약 1,500명이 교정에 모여 궐기대회를 열고 해산했다.
▶연세대 25일 하오 2시, 연세대 학생들은 동교 노천극장에 모여 ‘구국비상결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약 15분 만에 해산했다.
▶서강대 25일 상오 11시 30분부터 서강대 학생 300여 명은 동교 학생휴게실에 모여 ‘난국타개 학생궐기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약 30분 만에 해산했다.
▶국제대 25일 하오 8시 30분, 국제대 학생 100여 명은 동교 204호 강의실에 모여 난국타개 성토 대회를 열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국민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부산 동아대 25일, 부산에서는 동아대생 3,000여 명동아대 시위학생 수에 대해 1,000여 명(『경향신문』 1964.5.25 석1면), 4,000여 명(『동아일보』 1964.5.25 석7면) 3,000여 명(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73쪽)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상오 9시 30분, 성토 및 궐기대회를 열고 경찰관의 학원난입, 무장군인의 사법부 침입, 한일굴욕외교반대, 민생고문제, 구속학생 석방,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 등을 규탄하고 사법권 독립유지에 대한 궐기를 했다.『부산일보』 1964.5.25 석7면

▶춘천교육대 25일, 춘천에서는 춘천교육대생 300여 명이 사법권 수호, 굴욕외교반대, 경찰의 학원사찰 중지 등을 외치고,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가두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경찰의 저지로 학교에서 중앙 로터리에 이르는 동안 4차례나 경찰과 충돌했는데, 경찰이 상오 10시 40분 트럭 2대로 학생들을 연행하자, 상오 11시 20분 현재 일부 학생들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경향신문』 1964.5.25 석1·7면, 『동아일보』 1964.5.25 석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