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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 준비과정 밝혀져

25일자 〈경향신문〉 등은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도했다. 이에 의하면 5·20데모 직후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학생들은 ‘학생진로에 대한 공동의사의 반영과 공동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와 함께 정부의 근본적 혁신책을 요구하게 되었다.
22일 밤 종로 K다방에 8개 대학 간부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공동행동과 공동의사의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공동의 광장을 어디로 택하느냐의 문제를 논의한 끝에 되도록 혼란한 정국에 불씨를 던지지 말자는 의도에서 각 대학교 교정으로 의사통일을 보았다.
23일 수도사대에서 계획을 구체화시켰는데, 전날보다 6, 7개 대학의 학생회장단이 더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는 대회를 성토로 그칠 것인가, 교문 밖으로 나가 시위를 할 것인가의 문제로 학생 간 대립하였으나, 학교마다 특수사정을 고려해서 성토까지를 원칙으로 한다는 온건파의 의견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학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데 반항하자는 의견에는 공감하나, 그 이상의 문제에는 의견 조화에 고심하고 중용적인 문안작성을 다짐했다.
대회 전날인 24일에는 고려대에서 20여 개 대학 대표들이 다시 모여 각 대학에서 내놓은 초안을 절충, 혼합하여 선언문, 결의문(대정부 경고문 포함),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행동강령 등의 문안을 다듬었고 이를 인쇄하였다.경향신문』 1964.5.25 석7면. 전국 30여 개 대학 학생회가 연합하여 ‘난국타개 학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준비했던 ‘난국타개 궐기대회’는 실제로는 일부 학교에서만 집회가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학교에서 가두시위 없이 학내집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또한 박정희 정권과 밀착한 몇몇 학생회로 인해 모의 과정에서부터 외부의 개입이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갈등이 많았다. 이 궐기대회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오제연은 궐기대회가 학생회라는 전체 학생의 공조직을 한일협정반대투쟁의 중심으로 이끌어냈다는 면에서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대회 행동강령에서 “금주 내 우리의 의로운 주창(主唱)이 관철될 획기적 전기가 없을 때는 4·19정신으로 실력투쟁도 불사할 것을 천명한다”고 명시하고, 실제로 1주일 간 행동을 유보하기로 함으로써 대규모 항쟁의 여지를 열어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재오는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 대중에 기반을 갖지도 못한 조직이 운동 고유의 흐름을 냉각시켰으며, 주최 측의 나약함과 구호의 산발 등으로 대학가 여론의 효과적 집약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요시자와 후미토시 역시 이 궐기대회는 결과적으로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다만 5·20 시위를 주도한 급진적 지도자가 잇달아 구속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이들이 반대운동을 계속 이어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그 한계와 의의를 지적하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23~430쪽. 이재오,『한일관계사의 인식Ⅰ-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 학민사, 1984, 205~206쪽. 요시자와 후미토시, 「한국에서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전개-1964~65년을 중심으로」, 중한인문과학연구회 국제학술대회, 2001, 206~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