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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일대에서 격렬한 시위 일부 시민들 시위대에 합류

3일, 서울 시내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였다.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 건물 앞의 경찰 제1저지선에 걸려1차 저지선이 뚫린 때부터 시위진압업무는 수도경비사령부로 넘어갔다. 서울 주변의 군은 이미 4·19 이후부터 시위진압 훈련을 받아오고 있었다.(홍석률,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6·3운동」, 『근현대사강좌』제6호, 1995, 126쪽)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10,000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미터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2저지선(경기도청 앞)과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고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이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청와대를 경비하고 있던 중무장한 공수부대를 포위함으로써 6·3시위는 절정으로 치달았다.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12쪽. 오제연은 박정희 정권이 계엄령 선포를 위해 학생시위를 방조 혹은 유도했다는 의혹도 있다고 하였다. 6·3시위 당시 경찰 저지선이 너무 쉽게 뚫렸다는 점, 정권이 한학련 관련 일부 학생회를 통해 운동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 6·3시위 후 서울 시내 종합대학 신문들이 일제히 한학련을 불신하기로 한 점 등이 주요 근거이나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 증거는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시위진압을 위해 계엄 선포를 준비하고 있었던것만은 사실이었다는 것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31쪽)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학생들을 격려하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였다. 또한 학생 시위대에 합세하여 경찰에 투석하고 경찰 차량을 파괴하기도 했다.6·3시위 당시 시민들의 참여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다수는 시민의 호응과 참여가 매우 컸다고 강조한 반면, 일부는 의외로 냉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언론도 동아일보는 시민의 호응과 참여를 강조한 반면, 경향신문은 이날 오후 3시 현재 “데모대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불안한 표정을 띠고 있다. 4·19 때처럼 호응할 자세는 아직 취하고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30쪽) 서중석과 홍석률도 6·3시위는 규모가 컸지만 시민의 호응이 미약했다고 하였다.(서중석, 「1960년 이후 학생운동의 특징과 역사적 공과」, 『역사비평』 겨울, 1997,29쪽, 홍석률, 「굴욕외교 반대투쟁과 6·3운동」, 『근현대사강좌』 제6호, 1995,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