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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농성 5일째, 각 대학으로 확산 단식학생들 시위대에 합류
▶서울대 3일,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단식투쟁을 계속하던 문리대에서는 상대, 의대 등과 ROTC학생들까지 가담, 300여 명이 훨씬 넘었으나, 퍼붓는 비 때문에 이학부 신축공사장 시멘트 바닥으로 옮겨 밤을 새우고 마이크로 정부를 규탄하면서 계속 농성중이다. 이들 학생 중 쓰러진 학생들만도 40여 명, 치료를 받은 뒤 병원에서 나와 다시 가담한 학생들이 30명이며 10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 한편 2일 밤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풀려 나온 서울대 법대생 70여 명은 단식농성 데모에 들어가 3일 동교 광장에 가마니를 깔고 계속 농성하였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정정길(법학 4년)은 졸도하여 입원실에 누웠다. 3일 아침 함석헌은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의 단식학생들을 찾아 “학생들은 외롭지 않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는 단식투쟁이 가장 좋은 길이며, 투쟁의 목표는 위정자들의 무기보다 그 양심을 찌르는 데 두어야 한다”고격려하고 단식투쟁의 방법을 설명해 주고 돌아갔다.
이들 단식학생들은 단식 100시간을 돌파한 뒤 오후 5시경 단식을 중단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문리대생들은 단식 때 차림으로 앞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을 당한 송철원을 들것에 들고 거리로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를 이현배가 산책 나오는 척하다 대기 중이던 택시에 태워 데리고 온 것이다. 단식학생들은 깔고 누웠던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태극기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섰다. 단식 중이던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도 문리대 시위대에 합세하여 침묵행진을 하며 세종로로 향했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는 완전히 데모대들로 뒤덮여 있었다. 방송에서는 시간마다 데모대의 진출상황을 보도했다. 얼핏 4·19를 방불케 했다. 이미 중앙청 앞의 바리게이트는 무너졌고, 통의동 앞에 트럭들이 커다란 판막을 세워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게 했다. 모든 시위군중이 가마니를 쓴 행렬에 길을 비켜주고 박수를 쳤다. 이들은 시위의 선두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오 6시 조금 지나 판막이 뒤에서 최루탄이 쏟아져 날아왔다. 뒤에서부터 혼란이 일어났다. 문리대생들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상당수가 문리대 교정으로 돌아왔다. 수십 발의 최루탄 앞에 자진해산한 것이다.
학생들이 교정에 돌아오자마자 계엄령설이 퍼졌다. 시위가 크게 번지지 않았던 정오경부터 계엄령설이 돌았고, 중앙청에서 철수하여 동아일보사를 돌 때 군이 한강을 넘어섰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정에 돌아온 학생들은 재빨리 여학생부터 피하게 했다. 8시쯤 계엄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국대 3일, 2일 하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던 동국대생은 단식 이틀째를 맞아 그 인원이 49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시민들과 학우들이 보내온 달걀과 피로회복제 등을 극빈자들에게 주기로 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 동교 총학생회에서는 이 단식투쟁을 총학생의 의사로 규정, 학생회 간부 2명이 이에 합세했다. 이날 상오 함석헌이 단식학생들을 찾아 이들을 격려하고 돌아갔다. 11시 40분경 단식학생들은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돌입했다.
-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196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