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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데모 확대일로 시내 각 대학생 15,000여 명 “박정권 물러나라” 외치며 데모

3일 서울, 수원, 대전 등지에서 15,000여 학생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박정권 물러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서는 서울대생 2,000여 명, 고려대생 약 2,000명, 연세대생 약 2,000명, 한양대생 약 3,000명, 성균관대생 약 1,000명, 동국대생 약 1,500명, 홍익대생 1,000명, 숭실대생, 건국대생, 경희대생, 중앙대생 등이 시위에 나섰으며, 수원에서는 서울대 농대생 600여 명이 구보로 경수가도를 달려 북상했으며, 대전에서도 충남대생 400여 명과 청주상고생 1,500여 명이 성토대회를 마친 뒤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무단정치 박정권은 민족 위해 물러나라”,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과 충돌하면서 도심을 향해 진출했다. 서울 시내 각 대학생 7,000~8,000명이 중앙청 앞거리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에 빠졌으며, 군경 차량을 탈취한 일부 시위대는 차를 몰고 세종로 거리를 내달렸는데,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오 2시 30분경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서울대 등 3,0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 “박정권 하야”를 외친 후 중앙청 쪽으로 달려가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대의 뒤에는 많은 시민들이 따랐다. 시위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대 농대 3일, 가장 먼저 시위를 시작한 서울대 수원 농대생 600여 명은 아침 6시에 발대식을 가진 후, 7시 40분경 170리 길을 도보로 행군하여 서울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 도보 행군은 2일 학생간부들이 서울로 가서 문리대생과 합세하여 단식투쟁하기로 결의, 3일 학생들이 교정에 집합하여 ‘비상구국결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말라빠진 농민모습 이것이 중농이냐”, “구속학생 안 풀려면 백만학도 구속하라”, “자유당이 무색하다 부정부패 일소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수원 시내를 통과,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수원서 기동경찰 60여 명은 최루탄 등으로 무장, 수원과 시흥군 접경인 지지대 고개에서 농대생들의 행진을 막으려 했으나 학생들이 양쪽 산등성이를 넘는 바람에 허탕, 안양에서 대치하여 농공과 3년 김기정(25) 등 50여 명이 수원서 및 안양서에 연행되었다. 지지대 고개를 통과할 때 30여 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학생들의 행군은 12시간여 동안 계속되어 먼저 도착한 150명이 중앙청에 당도했을 때 오후 6시 55분이었다.
▶연세대 3일, 연세대 학생 2,000여 명은 상오 11시 50분경 “무단정치 박정권아 민족 위해 물러가라”, “순진한 애국학도 죄없다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1시 50분경 아현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학생들은 투석으로 응수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군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이어 시위대에 홍익대생 300여 명동아일보는 1,000여 명으로 보도(『동아일보』 1964.6.3 석7면)과 시민 400여 명이 합세했고, 이들은 경찰과 일진일퇴하며 서대문 쪽으로 향했다. 충정로를 지날 때는 경기공고학생 100여 명이 합세했다.
▶홍익대 3일, 홍익대생 300여 명은 하오 1시경 교문을 나와 신촌로터리까지 진출, 연세대생들과 합류하여 투석전을 벌였다. 이들은 중앙청과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했다.
▶성균관대 3일, 성균관대 학생 1,000여 명은 상오 11시 30분경 교내에서 구국투쟁궐기대회를 갖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게슈타포’나 ‘게페우’ 같은 악랄한 나치즘과 코뮤니즘의 수법에 맡길수 없다”고 대정부성토를 한 다음 교문을 나섰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의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붓기 위해 우리들은 분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전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이어 “민족반역자 김○○입니다→나는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실정책임자 박○○입니다→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겠습니다”, “민생고 꼭 좀 살려주십시오”라는 허수아비 3개중 “실정책임자”라고 쓰인 허수아비를 교내에서 화형한 후 나머지 2개의 허수아비와 “두야 두야 석두야 백의민족에 게다짝을 얹으려는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 투쟁하겠다”면서 청와대를 향했다.
이들은 하오 12시 40분쯤 효제국민학교 앞에서 경찰과 충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투석으로 응수했다. 이어 “빛 좋은 개살구야 박정희는 하야하라”, “경찰은 도둑이나 잡아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하오 1시 50분 종로5가 쪽으로 다시 밀고 나갔다. 학생 선두는 하오 2시 15분“학생만세!”라는 시민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박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세종로까지 진출했다.
▶고려대 3일,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11시 30분 교정에서 구국궐기대회를 열고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의문,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데모에 들어갔다. 이들은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평화선 사수”, “구속자 석방하라”, “못 살겠다 박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후 안암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자 경찰이 쏘는 최루탄에 투석으로 응수하며 대치하였다. 연도에 있던 1,000여 명의 시민들은 학생들에 호응, 학생들과 합세해서 경찰에게 투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1시 40분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하였다.
고려대 선언문 요지 우리는 지성과 행동으로써 국민과 함께 민족정기를 무기로 박정권 타도의 구국투쟁에 나선다. 우리는 대일굴욕외교가 국민합의의 바탕이 없음은 물론 민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못한 채 꼭 5·16 해치우듯 날뛰는 현 집권세력을 불신한다. 그들은 평화선을 가장 몫이 좋은 대한의 영토를 정권의 판공비로 몇 닢 받고 왜에게 팔려 한다. 그 탐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왜에게(……) 5·16쿠데타는 4·19정신의 반동이며 이 땅에 태어나서는 절대로 안 될 친일 반민족세력이었다. 공화당 정권은 외세의존의 매판종속경제로 민족주체성과 자존을 말살하여 나라를 송두리째 들어 먹으려 한다. 일본은 동북아의 지주로서의 탐욕으로 다시 군국주의 망상을 되살리고 이 나라의 친일세력은 그 앞잡이의 깃발을 흔들며 우리를 꼬드긴다.(……) 우리는 박정권에 호소한다. 그대들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현혹된 순박한 애국시민들의 진정한 마음을 아는가. 제발 우리 젊고 간절한 자존과 자주성을 사취하여 사악하게 정권을 틀어쥔 그 간교한 술수를 다시 써먹지 말라. 묻노니 권력의 용전(用錢)이 궁하여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인가. 파쇼화, 매국매족, 반민주적 정권 연명이 구걸외교, 영토매도의 몇 닢으로 가능한가. 매국적이고 자존과 주체성을 파는 그대들의 패도에 처절한 분노로 우리의 순수한 가슴은 끓는다. 그대들의 집권능력은 군정 3년을 통해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이제 총과 최루탄과 영토 팔아 챙긴 돈으로 그 권력을 지탱하려 한다면 무능한 쿠데타 정권의 종말이 어떤가를 훨씬 빨리 알게 될 것이다. 국민은 그대들의 비전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역사는 정의와 국민의 편이다. 박정권은 국민 앞에 정중히 고별인사를 하라. 미국은 일본을 축으로 하는 극동정책을 완전히 중단하라.(……)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국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지킨다. 우리는 이 땅에 자유와 민주의 꽃이 활짝 피고 번영의 행운이 올 것임을 믿는다. 민족분열과 혼란이 비참한 민중의 삶이 지천으로 깔린 현장에서 이를 탈피하려는 국민적 열망과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하노라.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출판부, 2005, 182쪽 고려대 결의문 1. 4·19정신과 민족적 이익에 매국 매역하는 박정권은 하야하라.
1. 평화선은 백만 어민의 생명선 매국정부가 흥정할 수 없다.
1. 구속된 애국학생과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
1. 한일회담은 제2을사보호조약이다. 미국은 감독을 자처하지 말라.
1. 박정권은 학생의 정당한 요구를 총칼로 탄압하지 말라.
1. 각계각층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1. 일본은 군국주의 망상을 버리고 과거를 정당한 값으로 청산하라.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출판부, 2005, 182~183쪽
▶서울대 의대 3일, 서울대 의과대생 200여 명은 상오 10시 30분쯤 강당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개최, 결의문과 선언문을 채택한 후 데모에 들어갔다. 이들은 “황소의 병명은 급성맹장염”,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다가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
▶서울대 약대 3일, 서울대 약대생 약 300명은 오전 10시에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을 나섰다. 이들은 “최루탄은 인체에 맹독성이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동 입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상오 11시 30분경 여학생 50여 명을 제외한 남학생 250여 명을 트럭에 실어 연행했다.
▶서울대 치대 3일 상오 10시, 서울대 치대생 300여 명은 교내에서 난국타개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나서 10시 30분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상구국선언문을 낭독한 후 연좌했다. 국회 앞에서 낭독한 선언문의 요지는 “정부는 5·16 이후 감행된 부패를 규명하고 부패근절의 보장을 약속하라. 악덕재벌의 부정축재를 민생고 해결에 투하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강구하라”는 등이었다. 이들은 상오 11시 20분 무술경관에 의해 트럭에 실려 강제 해산되었다.
▶서울대 사대 3일 상오 11시 30분쯤 약 400명의 서울 사대생들은 강당에 모여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고 ‘학원사찰중지’, ‘교권확립’ 등을 내걸고 약 30분 동안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어 교문을 나와 “쟁취하자 학원의 자유”, “구속학생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신설동 쪽으로 향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동국대 3일, 동국대생 1,000여 명은 상오 11시 50분 교내 도서관 앞에 모여 피고인 ‘오일륙(吳一陸)’에 대한 재판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 5·16군사혁명 이후 저질러진 온갖 부정부패상을 낱낱이 고발, 극형에 처할 것을 판결하는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피고 오일륙에 내란죄를 적용, 허수아비를 화형에 처했다. 이어 학생들은 하오 12시 40분경 데모에 돌입했다.
▶동국대, 서울대 음대 3일, 동국대생 2,000여 명과 서울대 음대생 150여 명은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던 중 을지로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한양대 3일, 한양대생 2,000여 명은 교내 노천극장에 모여 선언문 낭독, 행동강령 제창 후 교문을 나서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왕십리에서 경찰과 충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투석전을 벌였고, 양쪽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후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고 을지로를 거쳐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건국대 3일, 건국대생 600여 명은 하오 2시 30분 경 교문을 나서 데모에 돌입했다.
▶숭실대, 중앙대 3일, 숭실대생 500여 명과 중앙대생 800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시위에 돌입했다.
▶충남대 농대 3일, 충남대 농과대학생 400여 명은 상오 9시 30분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중농정책을 펴서 농민을 구제하라”, “학원사찰 중지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을 외쳤다. 이들은 10시 40분쯤 “무력한 황소, 농민은 통곡한다”, “박정권은 책임지라”, “쑥도 풀도 없다 밥을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는데, 동교 문리대 앞길에서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다. 정오 현재 경찰은 군 트럭을 동원, 15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해 갔는데 나머지 학생 30여 명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 대전소방서 앞에서 연행된 학생들이 돌아올 때까지 연좌데모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고 데모 중이다.
▶청주상고 3일 낮 12시 5분, 청주상고생 1,500여 명은 교정에서 현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낭독한 뒤 교문을 나서 데모에 돌입했다.
▶제주상고 3일, 제주상고 학생 1,500여 명은 3일 정오를 기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돌입, 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여 10명이 연행되었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경향신문』 1964.6.3 석1·4면, 『동아일보』 1964.6.3 석1·7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61~416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27~4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