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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본 6·3운동
이 투쟁에서 봉기자들은 1,572명의 괴뢰 경찰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12개의 괴뢰경찰 파출소와 2개의 괴뢰 행정기관 건물, 60대의 경찰차와 12대의 경찰 사이드카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또한 투쟁과정에서 학생들과 시민들도 1,352명이 부상당했으며 연 3,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4월 인민봉기 이후 남조선에서 있은 가장 큰 대중적 정치투쟁인 6·3봉기는 남조선의 인민운동 발전에서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6·3봉기는 선행한 투쟁들에 비하여 보다 높은 단계에서 전개되었으며, 그 조직성과 의식성, 완강성과 지구성, 성격과 전술 면에 있어서 일련의 새로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6·3봉기는 정확한 투쟁 단계의 설정, 매 단계에 적응한 투쟁구호의 제기, 다양한 투쟁 형태의 채택 등 전술 면에서 종전의 투쟁보다 훨씬 발전하였다.
3개월에 걸친 이 봉기는 대체로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적마다 그 투쟁의 내용과 성격에 있어서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제1차 투쟁은 3월 24일부터 3월 30일까지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 투쟁은 박정희 도당이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국회비준’의 계획 밑에 ‘한일회담’을 결속지으려던 절박한 시기에 ‘굴욕외교반대’의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이 흉책을 좌절시켰다. 1차 투쟁에서는 반‘정부’, 반매판 구호, 나아가서는 일부 반미 구호도 제기되었다. 이 투쟁에는 38개 지역에서 37개 대학과 163개 중고등학교가 망라되었으며 21만 7000여 명의학생과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이 투쟁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투쟁 의식을 높여 주었으며 남조선의 광범한 사회계에 커다란 혁명적 영향을 주어 보다 높은 투쟁을 준비하게 하였다.
제2차 투쟁은 4·19 4주년을 계기로 전개되었다. 4월 17일부터 21일까지 전개된 이 투쟁은 그 예봉을‘한일회담’ 반대와 ‘4·19 정신’을 모독한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데 돌림과 함께 반파쇼 민주주의 구호와 민생고 해결을 요구하는 구호를 높이 추켜들었고 군중들의 합류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9개 지역의 27개 학교에서 2만 6000여 명이 참가한 이 투쟁은 비록 규모에서 제1차 투쟁보다 작았으나 조직성과 반제적 성격 및 반파쇼 민주주의적 성격을 더욱 뚜렷이 표현하였다.
제3차 투쟁은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 17일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제3차 투쟁은 학생운동에 대한박정희 도당의 탄압과 ‘환률’인상 등으로 인민들의 반‘정부’ 기세가 높아진 정세를 포착하고 파쇼적쇼 ‘군사정변’ 3주년을 계기로 하여 박정희의 매장을 상징하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단식투쟁으로 군중을 선동한 다음 6월 3일 괴뢰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폭동에로 진출하였다. 이날 서울시내 학생들은 중앙청을 일시 점령하고 국회의사당을 포위했으며 청와대에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또한 학생들은 서울시청,서대문 경찰서, 성동소방대, 중앙선거사무소, 경찰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그 일부를 파괴 또는 일시 점거 하였으며 괴뢰경찰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은 박정희의 계엄령 선포로 일시 중단되었고 다만 지방들에서 6월 5일까지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전개된 제3차 투쟁에는 33개 지역의89개 학교에서 7만 35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했고 1만여 명의 시민이 합세했다.
제3차 투쟁은 비록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지는 못했으나 지난 시기의 투쟁에 비해서는 물론 1차, 2차의 투쟁에 비하여도 조직성이나 의식성, 투쟁 형태에서 훨씬 발전하였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전면에 내걸고 정치적 구호와 경제적 구호를 결합시켰고 현 사회제도의 변혁과 반미, 조국 통일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지향을 뚜렷이 표현하였다. 학생들은 조성된 정세에 적응하게 투쟁을 일단 중지하고 대열을 수습 결속한 다음 다시 계기를 잡아 진출하는 등 진공과 퇴각을 정확하게 결합함으로써 투쟁의 주동을 잡고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번 투쟁이 4월 인민봉기 때보다 투쟁 전술 면에서 일층 더 발전하고 능숙해졌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한 6·3봉기는 선행한 투쟁들에 비하여 그 규모가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무장 경찰과 맞서완강하게 투쟁하면서 장기간의 지구전을 전개했다. 이번 투쟁에 망라된 지역을 보면 4월 인민봉기 때보다 13개 지역 여수, 강원도, 제주도 등지에까지 투쟁이 파급되었다.
더욱이 박정희 도당은 5만 9000여 명의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처음부터 최루탄과 곤봉으로 학생들을 탄압했으나 그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3개월에 걸쳐 완강한 지구전을 전개했다. 이는 남조선 학생투쟁이 적들의 야수적인 폭압하에서도 그 역량이 날로 장성되면서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여 준다.
학생들은 ‘반식민주의’, ‘반외압’(외국의 압력 반대), ‘우리의 투쟁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의 봉기’라는등 반제 구호를 들고 일제 재침을 반대해 투쟁했으며, 직접적인 반미 구호는 제기하지 못했으나 ‘미국은 가면을 벗으라!’,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 말라!’는 등의 구호로 미제를 공격하였다. 또한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타도와 ‘중앙정보부의 해체’, ‘정치범의 즉각 석방’ 등 파쇼 통치체제의 변혁과 정치적 자유를요구하였으며 이에 매판자본의 몰수, 민생고의 해결 등 인민들의 절실한 이해관계를 결부시켰다. 더욱이 그들은 ‘민족의 단결 없이 남북통일 할 수 없다!’, ‘민족분열 획책하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등 조국 통일에 대한 지향을 표현하였다.
6·3봉기는 ‘한일회담 조기타결’ 책동을 좌절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극동에서 침략체계를 강화하려던 미제의 책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박정희 도당의 파쇼 통치체제를 밑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또한 6·3봉기는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미제와 박정희 도당의 반동적 본질을 더욱 똑똑히 인식하고 정치적 각성을 높이게 하였으며 그를 반대하는 투쟁에 과감히 나서게 하였다”.
-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해외 및 북한 196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