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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학생 석방 범국민운동 펴기로

11일 상오, 6·3사태로 투옥되었던 민승(건국대), 서울대 문리대 학생위원장 김덕룡 등 대학생 8명과 김동영(민정당 공보부 차장) 등 정치인 4명, 함석헌 옹, 하은철(4·19동지회)씨 등 약 20명은 대성빌딩에 모여 6·3시위로 아직도 옥중에 남아 있는 “동료들의 구출을 위해 범국민운동을 벌일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집권자의 시대착오적·비애국적인 행동윤리를 방관할 수 없어 거리에 나선 것”이라며, “권력인에 대한 반성과 젊은 세대에 대한 관용을 대망하면서 우리들의 목적과 취지가 관철될 때까지 다짐한다”는 요지의 선언문과 석방운동을 위한 결의문(별도 하단)을 채택했다. 이들은 첫 단계로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과 옥중 학생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기 위해 가두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한편 11일 상오 7시부터 중앙대학교 정문 앞에 “구하자 우리 학우들”이란 표어 아래 구속학생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정오 현재 서명날인은 4,000명에 달했다.『동아일보』 1964.9.11 석3면, 『경향신문』 1964.9.11 석3면
6·3운동 관련 구속자 석방운동 결의문 여기 우리들은 6·3사태로 인하여 구속된 우리들의 동지를 구하고자 용감히 일어섰다.
학원이란 진리의 성정에서 우리들은 현실사태에 참여하게 된 것은 불행으로 생각한다.
불행한 조국을 생각할 수 없었기에, 학원이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집권자의 몰지각한 시대착오와 비애국적인 행동윤리를 방관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지성이 되겠기에.
우리들은 용감해야 할 때 신중하다는 것을 증오한다. 분노가 과격했다 해서 폭압으로만 다스려져서는 안되며 신의를 위하여 싸우는 데 온건한 것만을 미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선배가 남긴 4·19혁명이라는 역사의 기록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터전을 바로잡고 짓밟혀가는 자유를 되찾게 했다는 증언을 상기할 때 4·19혁명의 정신은 지금 우리들이 산 교훈으로서 물려받은 조국수호의 심벌이 되는 것이며 또 다음 우리들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정신적 유산이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불의와 부정을 보고 노하게 되는 것이며 조국의 앞날에 불행의 씨를 뿌리는 어떠한 권력에도 죽음의 항거를 주저치 않는 것이다.
6·3사태는 바로 이상과 같은 정신에서 조국의 내일에 굴욕적 외교사로 장식시켜서는 아니 되겠다는 사회정의의 심정에서 학원의 문을 박차고 불합리한 현실에 도전한 것이다.
다시 다짐하오니 우리는 권력의 욕심도 없고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원치 않는다. 오직 조국의 내일을 위하여 힘차게 싸우는 학도들이며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것을 자부할 수 있는 순결한 지성인인 것이다.
사리와 사욕이 없는 자에게 대의와 공정이 지나쳤다는 비난이 성립될 수 없다고 단정하며 우리들의 정신을 죽이지 못하는 한 육신의 구속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를 같이 하는 학우들은 학업을 계속하는데 애국충정의 발로로 거리에 뛰어나왔다 해서 그 무더운 삼복더위를 지났건만 언제나 돌아올는지 모르는 옥중 동지들을 생각할 때 용솟음치는 분통을 금할 길없어 옥고를 같이 한 출옥동지(시민, 학생, 언론인, 정치인)들이 전위가 되어 옥중동지의 구출을 위하여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맹세한다.
이 운동은 권력인에 대한 반성과 젊은 세대에 대한 관용을 지망하면서 우리들의 목적과 취지가 관철될 때까지 피의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서기 1964년 9월 김덕룡(서울대) 김동영(민정당) 김홍식(고대) 노수길(단대) 민승(건대) 박동인(동국대) 박의정(국민의 당) 서헌무(한양대) 오성섭(성대) 윤상철(『경항신문』) 이건우(4·19백상동지회) 이복재(민주당) 이종관(경희대) 이종률(『동아일보』) 이춘우(자민당) 조가행(일반시민) 최창봉(동아방송) 하은철(4·19동지회)
(가나다순)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86~4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