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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 대학 조인 반대 시위 전개

고려대=22일 오전 11시 반, 1,200여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교정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제2의 을사조약을 철회하라”,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투쟁을 선포한다”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결의문을 통해 일본의 경제 침략 야망 포기와 미국의 한미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학생들은 유진오 총장의 만류를 무릅쓰고 낮 12시경 “정조인을 즉시 중단하라”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 안암동 로터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이 최루탄과 연막탄을 쏘자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서 한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일단 학교로 후퇴, 낮 1시 30분 500여 명의 학생들은 다시 신설동 로터리까지 진출, 경찰기동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낮 1시 50분 일단 분산, 그중 100여 명이 2시 20분 동대문 부근에 모여 시내로 향했고 5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고대신문』 1965.6.26 3면. 6월 22일 고려대 데모에 참가한 학생 규모에 대해 경향신문은 1,000여 명으로, 고대신문은 1,500여 명으로 보도 고려대 선언문 (요지) 민족적 양심과 지성의 부름으로 2년간 외쳐온 우리의 주장이 한갓 단어의 파편만을 남긴 채, 독선과 졸속으로 치달린 한일회담은 드디어 치욕적 종식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새로운 식민정책이 연출하는 한민족에 대한 갖가지 모욕적인 언행은 조약문의 자구에 이르기까지 심한 우롱으로 일관하고, 이를 감수하려는 공화당 정권은 지성을 불신하고 참다운 민의를 짓밟음으로써 급기야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4월 혁명이 대내적 주권수호를 위한 정의의 투쟁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이 함성은 대외적 민족수호를 위한 생명의 절규이다. 우리는 타락한 사회정의와 천박한 정신풍토 위에서 간악하고 착취적인 타민족과의 직접간접적인 교류를 재촉하는 것은 자기멸망의 첩경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단순히 패배의식의 발로라고 보아 넘길 수 있는가? 세계의 후진제국이 예속의 진통에서 깨어나 자주적 발전을 모색하는 차제에 침략적 외세도입의 우행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역사의 발전과정이 항시 지성의 외침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강조하면서 민족생사의 문제로 대두한 매국적인 한일협정을 필사적으로 저지할 것을 선언한다.
이 투쟁은 바로 완전한 자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침략적 외세와의 투쟁이며 진정한 민주정치를 위한 진부한 기성세력과의 투쟁이다. 역사적 사명으로 결속된 우리의 대열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않을 것을 다짐한다.
1965년 6월 22일『고대신문』 1965.6.26 3면
고려대 결의문 (요지) 민권수호를 위한 4월 혁명이 진부한 보수세력에 의해 배신당한 차제에 다시 민족자존을 위한 민족의 파수임을 자각하는 우리는 자주와 전진의 기치 아래 뭉쳐 모든 외세의 재침을 막기 위한 적극적 투쟁을 선포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一. 매국적·굴욕적 ‘제2을사조약’의 조인을 결사반대한다.
一. 일본은 경제침략의 야망을 포기하고 미국은 진정한 우방국의 위치에서 한미관계를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
一. 천박한 매판독점자본세력을 배격한다.
一. 정부는 학원 간섭을 철회하고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을 건의한다.
一. 우리의 행위는 민족적 양심의 발로임을 천명한다.
1965년 6월 22일『고대신문』 1965.6.26 3면
▶연세대=22일 연세대 학생 500여 명은 휴강조치에도 불구하고 등교하여, 오전 11시경부터 한일협정조인반대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 시위를 벌였다. 김대준 학생처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는 데 희생이 문제가 되냐”고 주장하면서 데모를 감행하였다. 데모대가 아현동 로터리를 돌자 숨어있던 경찰기동대가 배후에서 습격하는 동시에 아현동고개에서 대기 중이던 기동대와 합세하여, 독안에 든 쥐와 같은 학생들을 무차별 난타하였다. 심지어 한 학생에게 5~6명의 기동대가 달려 붙어 마구 두들겨 패는 등, 아현동고개는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또한 가정집으로 숨어든 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 무자비하게 때려 실신시킨 다음 끄집어내어 경찰 트럭에 태운 다음에도 또 때리는 등 만행을 부려, 취재기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로 인해 윤영태(건축과 3년) 등 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곤봉에 머리가 깨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이날 데모에서 105명의 연대 학생들이 연행되었는데, 이들은 21일 연행된 학생들과 함께 22일과 23일에 전원 석방되었다.
한편 연세대 학생들은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시간에 맞춰 오후 5시경에 ‘매국노 황제 추대식’을 열고 한일협정의 불가성을 지적, 풍자한 다음 짚으로 만든 매국노 황제를 성토하고 화장하였다.『연세춘추』 1965.6.28 1면, 『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국대=22일 오전 10시 10분쯤 700여 명의 동국대 학생들은 “이동원을 즉각 소환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결의문을 낭독한 후 데모에 들어갔다. 10시 40분쯤 교문을 나선 학생들은 “굴욕적 한일회담 즉각 중지하라”, “교육포기 정책을 중지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구보로 퇴계로 5가를 거쳐 장충동 입구에 이르러 경찰과 충돌하자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날 데모로 47명이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에 의하면 데모에 참여한 동국대 학생은 1,000여 명임
▶건국대=22일 오전 6시부터 9시까지 한일회담반대 단식투쟁을 벌이던 건국대 학생 15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를 마치고 오전 10시 40분경에 단식학생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학생들은 한일회담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12시 10분 성동서 앞 로터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서자 낮 1시 15분쯤에 해산했다. 이날 데모에서 168명(한양대와 경희대생 일부 포함)이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대회에서 동국대 학생 강덕원(지리과 1년)이 한일회담결사반대의 혈서를 썼다
▶서울법대·상대=22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14일부터 9일째 단식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대 상대 학생 30여 명도 동참하여, 100여 명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22일 낮 12시 졸도 학생 수는 모두 185명이며, 보건진료소에서 치료받고 있는 학생이 20여 명에 달하고 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에 따르면, 22일 오전까지 졸도한 학생수는 176명이다.
▶명지대=22일 오전 10시 반에 명지대 학생 200여 명이 교내에서 한일회담중지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오전 10시 40분경에 “민중시위 막지 말고 한일회담 막아보자”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돌입하였다. 남대문을 거쳐 그랜드호텔 앞까지 진출했으나 대기 중이던 300여 명의 경찰기동대에 의해 저지당하자, 잠시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날 데모에서 6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데모에 참가한 명지대 학생수는 500여 명이다
▶성균관대=22일 오전에 1,000여 명의 성균관대 학생들은 교내에서 한일회담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11시경에 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 이화동 서울대 미대 앞까지 진출하였으나, 200여 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하였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자 학생들은 투석을 하며 대응하였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수도공대=22일 오전 10시, 400여 명의 수도공대 학생들이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한일협정조인 즉각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벌였다. 학생들은 대흥극장 앞까지 진출하였으나 대기 중이던 100여 명의 경찰기동대가 최루탄을 쏘며 강력히 저지하는 바람에 3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일단 해산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데모에 참가한 수도공대 학생규모는 250여 명이고, 연행된 학생은 50여 명이다.
▶서울사대=20일부터 단식에 들어간 서울대 사범대 학생들은 22일 현재 30여 명이 강당에서 단식을 계속 중이며 6명이 졸도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경향신문에 따르면, 단식투쟁에 참가한 학생은 20여 명이다
▶수도의대=22일 오후 1시쯤 150여 명의 수도의대 학생들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이 외무를 즉각 소환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창경원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으나, 경찰은 곤봉으로 구타하면서 학생들을 전원 연행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데모에 참가한 수도의대 학생은 200여 명, 연행된 학생은 100여 명이다.
▶홍익대=22일 낮 12시 30분, 300여 명의 홍익대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열고, ‘한일회담 유령 화형식’을 거행하고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회를 마치고 1시부터 시위에 돌입하여 아현동 로터리까지 나갔다가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날 데모로 40여 명이 연행되었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경향신문은 데모에 참가한 홍익대 학생규모를 500여 명으로 보도
▶한양대=22일 오후 1시경 500여 명의 한양대 학생들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마치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성동교로 진출하여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는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였다.『동아일보』 1965.6.22 석7면, 『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에 따르면, 데모에 참가한 한양대 학생은 1,000여 명이다.
▶이화여대=22일 오후 3시에 이화여대 학생 4,000여 명은 교정에서 ‘매국조인 절대 반대한다. 한일회담 중지하라’ 등 5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밤 9시 40분경 총장서리의 만류로 해산했다.『경향신문』 1965.6.22 석3면, 『동아일보』 1965.6.23 석3면 한편 이날 오후 12시 15분경 이대생 4,000여 명이 동교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벌인 후 데모에 들어서려 하자 전 총장이며 현 대학원장인 김옥길 여사가 마이크를 쥐고 “당신네들은 지금 흥분해 있다. 냉정한 판단으로 행동하라. 정녕 당신네들이 원한다면 데모해도 좋다. 내가 앞장서겠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가라”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열변을 토하자 “그만두라”는 야유가 튀어나왔다. 마이크를 되받은 한 학생은 “김(金) 선생의 말은 독일 모대학에서 한 이(李) 국회의장의 말과 똑같다. 우리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김 선생이 앞장설 필요도 없고 또 자격도 없다. 우리는 ‘주체의식’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눈물을 흘리며 이에 응수, 학생들의 박수를 받았다.『동아일보』 1965.6.23 석3면
▶숭실대=22일 오전 11시 반, 200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회담 정조인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보문고=22일 하오 5시쯤 대전 보문고 2년생 약 100여 명은 동교 운동장에 모여 한일회담반대 연좌시위를 벌이다 학교당국의 만류로 해산했다.
▶서울고=22일 오전 9시 반, 600여 명의 서울고 학생들은 학교 측의 돌연한 휴교조처에 항의하며 “공부를 계속하자”고 교정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외대=22일 오전 11시 반, 외국어대생 30여 명이 성토대회를 벌인 뒤 시위하려다 학교당국의 만류로 교정에서 단식 중이다.
▶서강대=22일 저녁 7시 반부터 서강대생 120여 명은 한일협정반대 준비와 관제방학을 반대하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경향신문』 1965.6.23 석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