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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비준무효화 시위 이어져

21일에도 한일협정비준을 규탄하는 대학가의 열풍은 계속되어, 이날 오전 서울대 문리대·법대, 한양대, 동국대생 등 1,300여 명이 한일협정무효화를 외치며 캠퍼스를 벗어나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력히 이를 제지하여 100여 명의 학생을 연행했다. 한편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생 2,000여 명이 매국문서, 매국국회, 매국정권 화형식 및 성토대회를 열었다.
서울대 문리대·법대=21일 오전 10시부터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학생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 학생들은 “참다운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여야 할 때가 온 것이며, 민족 외부의 노예화를 강제하는 한일매국조약은 필사코 민중의 힘으로 파기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결의문을 발표하고, “여하한 정책적 시험도 거부한다”는 내용을 학교당국에 건의하기로 합의 결정하였다. 총회를 마친 학생들은 가두데모에 돌입하여 이화동로터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에 막혀 학교로 되돌아왔다. 일부 학생들은 법대 성토대회에 합류하였다. 이날 학생들이 채택한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1. 일당국회에서 통과된 협정의 무효화를 위해 간단없는 투쟁을 한다.
2. 집권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기 위해 현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
3. 대학 내의 순수한 학술단체를 정치적 제물화 하려는 당국의 비민주적 처사는 이를 용납지 않는다.
4. 야당의원은 과감히 전원탈당하여 투쟁대열에 앞장을 서라.
5. 일본은 신제국주의의 흑심은 소각하고 위장된 제국주의 협정을 자진 폐기하라.
6. 외국은 민주국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양국 유대관계를 위협하는 우행을 하지 말라.
21일 오전 10시 30분경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은 도서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학생들은 “비민주·반민족적 방법으로 비준안 통과를 강행한 1당국회는 민주헌정의 근본이념을 뒤흔드는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우리의 투쟁은 결코 정치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고 정치이전의 문제로서 쓰러져가는 조국의 기둥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외치면서, “민족최후의 보루임을 자부하는 우리 대학생들은 선배들이 뿌린 피의 영광을 되새기며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양심과 긍지를 수호키 위해 투쟁대열에 뛰어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지난 3·24이래 줄기찬 투쟁을 계속한 우리 서울대 학생은 1당국회에서 통과된 협정의 무효화를 위해 간단 없는 투쟁을 계속한다”는 등 6개 항목의 결의 사항을 채택하였다. 대회를 마친 법대 학생들은 미리 데모를 벌였던 문리대 학생들과 함께 11시 30분경에 가두데모에 돌입하였다. 데모대는 이화동 로터리에서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투석으로 맞섰다. 낮 12시 50분경 75명(문리대, 법대)의 학생이 연행되고 일단 해산했다.『대학신문』 1965.8.23 3면
▶연세대=21일 오전 12시 10분부터 연세대 학생 500여 명은 한일협정비준무효와 정치인·경제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신임 학생회장단으로 구성된 총학생회가 개최한 대회에서 권상운 총학생회장이 개회사를 낭독하였고, 홍현삼랑(국문3) 문과대학 학생회장이 일본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정의웅 상경대학 학생회장은 “경제인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매국을 하느냐, 아니면 호국을 하느냐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사명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모든 일에 임하라”고 말하면서 경제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한편 정정덕(법3) 정법대학 학생회장은 정치인들을 규탄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결의문을 채택·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1. 비민주적인 일당국회 하에서 통과된 한일협정비분의 완전무효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 투쟁한다.
2. 공화당은 매국·위헌의 책임을 지고 일당국회를 즉시 해산하고 국민의 신임을 물어라.
3. 야당은 이 이상 말로만 국민을 기만하지 말고 행동에 나서서 즉시 무효화 운동에 앞장서라.
4. 민족정기를 망각한 일체의 경거망동을 규탄·분쇄한다.
5. 정부는 평화적인 시위를 탄압 말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6. 위와 같은 우리의 결의가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계속 투쟁한다.『연세춘추』 1965.8.23 1면. 연세춘추에 따르면, 21일 데모에는 연세대 의대생 100여 명, 본교 학생 400여 명이 참가하였다.
▶한양대=21일 오전 11시경 한양대생 500여 명은 시위에 돌입하여, 성동서 앞까지 나갔다가 경찰의 최루탄 세례를 받고 해산했다.
▶동국대=21일 낮 12시 50분경 동국대생 500여 명은 시위에 나서 대한극장 앞까지 나갔다가 기동대의 양면협공을 받고 일단 해산되고 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낮 1시 35분경 700여 명이 다시 천일극장 앞까지 나갔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흩어졌다.
▶고려대, 동양의대=21일 오전 고려대, 동양의대 학생들은 각각 교내에서 한일협정비준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한일협정비준의 무효화”와 “일당국회해산”등을 주장했다.『동아일보』 1965.8.21 석7면, 『경향신문』 1965.8.21 석7면, 『동대신문』 1965.8.27 1면. 동대신문에 따르면, 21일 동국대 학생의 데모에는 2,000여명이 참가하였다. 학생들은 ‘매국국회해산·비준무효’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비준무효’를 외치면서 시내로 진출하여 청계천 3가까지 나아갔다. 이날 데모로 동국대생 34명이 연행되어 이한성(4학년) 불교대학생회장만 구속되고 나머지 33명은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