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0시 44분, 한일 두 나라는 협정비준서를 교환, 정상국교관계에 들어섰다. 한일 간의 조약과 협정은 이날 비준서 교환으로 곧 발효되었으며, 비준서 교환이 끝나자 서울에는 일본대사관 간판이, 도쿄에는 한국대사관 간판이 걸렸다.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시이나외상 등 한일 두 나라 전권대표가 각각 ‘비준서 교환에 관한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이어 양국 전권대표단 고문단과 비준서 교환식에 참석했던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은 축배를 높이 들었다.
이날 대일굴욕외교반대투위는 17일부터의 단식농성을 마치고 비준서교환반대 시위를 벌였으며, 몇 개 학생단체가 성명을 발표했을 뿐 조인과 국회비준동의 과정에서 크게 유발됐던 반대운동은 혹한 탓인지 보이지 않았다. 비준서 교환식에 한일 두 나라 야당인사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것 역시 특이했다.오전 10시 30분, 이 외무장관 등 한국 측 대표들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 마련된 식장에 좌정하자, 곧 이어 시이나외상을 비롯한 일본 측 대표단이 입장했다. 이어 10시 31분, 정일권국무총리를 선두로 전 국무위원이 군악대의 아리랑 행진곡이 울리는 가운데 입장했다. 34분, 일본국가 ‘군(君)의 대(代)’가 먼저 연주되고 이어 애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한일 두 나라 대표는 비준서를 검토, 교환하고 교환을 확인하는 의정서에 10시 44분 서명했다.
의정서에 서명한 직후 이 외무장관은 “이제 두 나라는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사했다. 시이나외상은 이에 답하여 “제 조약을 성의를 다하여 실천함으로써 두 나라 국민의 우호적 협력관계의 증진을 위하여 노력할 결의”라고 말했다.
양국 외상 인사가 끝난 후 정일권국무총리는 “영원한 두 나라의 평화”를 위한 건배 동의에 따라 이날 참석한 두 나라 대표단과 그 수원들은 교환 축하 건배를 하고 11시경 한일협정비준서 교환식은 끝을 맺었다.1651『동아일보』 1965.12.18 석1면. 이날 교환한 제 협정 및 부속문서는 다음과 같다. ▶기본관계=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어업관계=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 동 부속문서 ▶재일교포법적지위관계=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국민의 법적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청구권 및 경제협력관계=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1의정서(무상), 제2의정서(무역채무) ▶문화재 및 문화협력관계=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동 부속문서(『동아일보』 1965.12.18 석1면) 한편 한일협정 체결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날은 을사강제조약이 체결된 지 꼭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일협정은 우리 정부가 거의 모든 문제에서 양보를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청구권이 핵심사안이 되다 보니까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기본 전제나 재일교포·어민 문제는 모두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한일관계 정상화는 일제 강점에 대한 일본 측의 사죄가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을 때, 이동원외무장관은 한일공동성명에서 “과거의 어느 기간에 양 국민에게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다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앞질러 이 문제를 회피하였고, 이어 시이나 일본외상은 “이러한 과거의 관계는 유감이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이것은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중국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것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표명하여, 일본의 전쟁책임, 가해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사죄한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또 기본조약 제2조에는 ‘한일합병조약’과 그 이전의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천명하여, 일제의 강점과 침탈을 인정하였다. 즉 1910년까지 강압에 의해 맺어진 조약들의 효력을 인정하였다. 정부는 강제조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것조차 제기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리고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총회 결의에 명시된 대로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헌법규정과는 달리 유엔총회 결의 그대로 대한민국의 관할권을 남한으로 제한한 것이었다. 박 정권이 가장 초조해하였던 청구권 자금은 앞서 언급한 대로 배상도 준배상도 아닌 일본의 ‘후의(厚誼)’로서 한일관계의 전도된 입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었고, 액수도 적었다. 더구나 일괄타결임을 분명히 하여 일제가 한국인에게 입힌 각종 피해를 다시는 거론할 수 없게 봉쇄해버렸다. 그 자금은 일본과 협의하여 사용하도록 명시하였고, 일본의 상품을 구입하게 되어 있었다.”(서중석, 「박정권의 대일자세와 파행적 한일관계」, 『역사비평』 봄, 1995,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