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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의문사 사건
박창수는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현 HJ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면서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과 함께 노조 활동을 시작했고, 1990년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을 성공리에 이끌며 9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부산노동자총연합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안기부 노사담당 요원이 사업장을 출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상시적으로 노조의 동향을 감시하고 정보를 빼내고 노조간부를 비밀리에 접촉해 갖은 회유와 협박을 했다. 심지어 단위 사업장의 임금투쟁에도 개입했다. 안기부는 박창수에게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탈퇴를 종용했다. 인신 매매범을 시켜 “전노협을 탈퇴하지 않으면 부인을 인신매매 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박창수는 계속되는 안기부의 탈퇴 종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노동자 연대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1991년 2월 대우조선파업투쟁 지원 논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해 5월 4일, 박창수는 이마에 의문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구치소측은 배구를 하다가 다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은 혼자 공놀이를 하다가 다친 것이라고 했다가, 박창수가 스스로 시멘트벽에 머리를 찧어서 다친 것이라고 번복했다.
박창수가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었던 5월 5일 밤, 안기부 부산지부 노사조정관 홍상태가 그와의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박창수와 함께 있던 한진중공업 노조 사무국장 장세군에게 전화를 걸어 '박창수가 전노협을 탈퇴하면 안기부가 석방에 힘쓰겠다'는 내용을 그의 부인에게 전했다. 그것도 모자라 늦은 밤 홍상태가 직접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박창수는 중환자실에서 갑자기 사라져 다음날 병원 밖 시멘트 바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함께 있던 장세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장세군이 5억짜리 72평의 호화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기사가 부산일보에 보도되었다.
박창수가 갑자기 의문의 사망을 하자 경찰은 그가 안치되어 있던 병원의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간 후 강제 부검을 실시했다. 그리고 박창수가 노동운동에 회의를 느껴 7층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7층에서 투신했다는 그의 시신은 상처 하나 없이 반듯이 누워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의 투신 지점이라고 밝힌 병원 옥상은 쇠창살과 자물쇠로 잠겨 있는 곳이었다.
박창수의 석연치 않은 사인과 사망경위를 두고 검찰은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단순 비관자살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유족의 요구로 의문사진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의문사위는 2004년 결정문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의 개입 사실은 드러났으나, 국가정보원이 관련 자료 요청에 협조하지 않아 진상 규명 불능으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4년에 박창수는 민주화보상위원회(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장으로서 당국의 노조탄압 상황 하에서 의문사하였다는 사실은 인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