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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행진곡은 연주되지 않았다 - YWCA위장결혼식사건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통대)에서 체육관 선거로 새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유신 청산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유신독재로의 퇴행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신반대운동을 해온 청년들로 결성된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를 중심으로 통대가 대통령 선출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 진영의 각계와 의논하여 통대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저지하고 민주화를 촉구하기 위한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박정희 사망 후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를 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묘수를 찾아야 했다. 이때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결혼식을 위장한 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결혼식이 되는 YWCA위장결혼식사건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위장결혼식의 시간과 장소는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 주례는 함석헌 선생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신랑과 신부를 누구로 세울 것인지가 문제였다. 신랑은 잡혀갈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지원자를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러자 민청협 운영위원인 홍성엽이 자청해 신랑 역할을 맡기로 했다. 신부는 ‘윤정민’이란 이름의 가상인물을 세웠다. 신부의 성은 윤형중 신부의 성을 쓰고 이름은 ‘민주 정부’의 앞 글자를 따서 순서를 바꾸었다. 청첩장도 제작해 각계의 사람들에게 보냈다. 이로써 가짜 결혼식의 진짜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결혼식 당일, 많은 민주인사들이 모여들어 내빈이 되었다. 흰 얼굴의 꽃미남 홍성엽은 흰 장갑을 끼고 가슴에는 꽃을 달고 진짜 신랑처럼 하객들을 맞았다. 강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 대성황을 이루는 모습이 연출되었으나 결혼식을 기획한 이들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되자 결혼행진곡은 울려 퍼지지 않고 신랑 입장과 동시에 사방에서 여러 종류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이어서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한다는 취지문이 낭독되었다. 이와 함께 배포된 ‘통대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는 통대에 의한 대통령선거는 민주회복으로의 전진이냐, 유신독재로의 퇴행이냐를 판가름 짓는 민족사의 대분수령이 될 것이니 통대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저지하는 것은 전 국민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또한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주도하는 거국민주내각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이 살포되었다. 김정택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장이 ‘통대선출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뒤편 출입구로부터 의자와 사람들이 한꺼번에 넘어지면서 강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회장을 둘러싸고 있던 계엄군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을 두들겨 패며 끌어냈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일부 참석자들은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 앞으로 모였다. 거기에서 대기 중이던 민청협 사람들과 합세해 스크럼을 짜고 가두시위을 벌였다. 그러나 뒤쫒아온 계엄군에 의해 일부가 연행되고 남은 사람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연행되어 간 사람들이 조사과정에서 당한 구타와 고문은 말할 수 없이 가혹했다. 가장 혹독한 고문과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능욕을 당한 사람은 해직교수 김병걸과 백기완이었다. 김병걸 교수는 고문후유증으로 오랫동안 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장시간 서 있을 수도 없어 1980년 해직교수들이 복직될 때에도 스스로 강단에 서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백기완은 한때 극심한 기억상실증과 정신착란증에 협심증까지 겹쳐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그토록 잔혹했던 계엄당국도 그를 더 이상 감옥에 방치할 수는 없어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그가 석방될 때 그의 체중은 40kg밖에 되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음과 같은 시간을 그는 시를 지어 주문처럼 읊으며 견뎌냈다.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로 일부가 쓰이게 되는 장편 시 묏비나리이다. 

홍성엽은 석방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의 민주화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후 천도교에 입문하여 정신수련과 교리연구에 전념하던 중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5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진짜 결혼은 하지 않아  '윤정민'의 반려자 곧 민주주의와 결혼한 남자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