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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과 권력 사이 - 어느 야당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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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1월, 3차 정치활동 금지조치가 해제되면서 신당 창당이 시작되었다. 신당 창당에는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이철승 등 구신민당 인사 및 해금인사, 민주인사 등이 주축이 되었다. 신당창당준비위원회는 창당원칙으로 ‘민주세력 중심의 정당’, ‘선명한 민주정당’ ‘민추정신의 계승 및 노동자, 농민 등 각계와의 연대를 지속, 강화하며 대변하는 정당’이 된다는 3개항의 창당원칙을 발표했다. 새 야당의 명칭은 ‘신한민주당’으로 정했다.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은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창당선언문을 통해 “민주화의 열망과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 민족의 주체세력으로 모든 반민주적 세력과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갑자기 당겨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까지 25일, 후보등록 마감일까지는 열흘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전국 각지 유세장마다 놀라운 숫자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전두환 정권 등장 이후 군부독재에 억눌린 민주화의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신한민주당 후보들은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발언들을 쏟아냈다. 전두환 군부독재 비판, 광주항쟁, 군의 정치개입불가, 대통령 직선제 등의 거침없는 발언에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관제야당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던 국민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진정한 야당의 출현을 기대했다. 제도권 야당에 거리를 두던 민주화운동 진영도 신한민주당의 유세를 응원했고, 방학 중이던 대학생들도 자발적으로 야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신한민주당은 서울 등 5대 도시에서 전원 당선되며 압승을 거뒀다. 군부독재 청산과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이 창당한 지 25일밖에 안 되는 신한민주당을 건국 이래 최대의 제1야당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신한민주당은 무소속과 민주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헌정 이후 최대의석인 103석의 거대야당이 되었다. 신한민주당은 공약대로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학원, 노동, 언론문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지원했다. 1986년 2월 12일, 신한민주당은 다가오는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과 함께 '1천만 명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했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시작으로 '1천만 명 개헌서명운동'에 본격 돌입했다.

국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집회에서 강하게 표출되었다. 신한민주당의 지역순회 집회는 3월 23일 부산집회에 10만 명, 4월 19일 대전집회에 10만 명, 26일 청주집회에 2만 명,5월 3일 인천집회에 10만 명, 10일 마산집회에 5만 명, 31일 전주집회에 1만 명이 참여했다. 신한민주당의 옥내집회가 끝나면 옥외 군중들은 항상 민통련을 비롯한 민주인사, 대학생들과 시위를 함께 했다. 30만이 운집한 광주집회에서는 신한민주당 측의 자제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살 책임자처벌' 구호가 나타났고, 10만 명이 모인 대구집회에서는 재야운동 단체인 민통련의 독자적 플래카드들이 등장하고 신한민주당과는 별도의 군중대회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개헌투쟁의 중심은 시간이 갈수록 신한민주당을 벗어나 민주화운동 진영과 국민들에게로 이동했고, 정권교체의 열망으로 거세게 타올랐다.

전두환 정권에게는 기회였다. 개헌투쟁이 타오르던 4월 30일, 전두환 정권은 신한민주당을 만나 1986년 초에 선언한 ‘임기 내 개헌불가’의 입장에서 물러나 정치권 안에서 개헌논의를 하고 가두서명운동은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신한민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기자회견을 열어 ‘일부 소수학생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 국민들은 당황했고 분노했다. 5월 3일, 인천집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에서 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현판식은 신한민주당 지도부가 대회장으로 입장하지도 못한 채 무산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인천집회 이후 민주세력을 좌경 폭력세력으로 몰며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다. 이후 신한민주당의 지역순회 집회의 군중 참여 숫자는 현격히 줄어들었고, 민심은 신한민주당에게서 멀어져갔다.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당론과는 달리 의원내각제 개헌도 조건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환영했다. 신한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민우 구상'을 지지하는 이철승을 비롯한 "8인연합"과 이에 반발하는 대다수 의원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당내 주류인 김영삼·김대중계 의원 74명이 1987년 4월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1987년 6월항쟁으로 쟁취되었다. 그러나 국민이 열망했던 정권교체는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신한민주당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고, 그 날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