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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다 알았던 죽음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죽음 - 김경숙 일기

그의 어머니는 자살할 애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살할 애기가 아니여. 어째 자살할 애기가 아니냐 하면, 경숙이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죽어도 광주 와서 산다고 했어, 서울은 공기가 안 좋으니까, 돈 벌어서 ‘나는 광주 와서 산다.’고 했어. 그리고 나를 못 잊고 동생을 못 잊어서... 지가 돈 벌어서 시집이라도 잘 가면 동생 잘 가르치고, 저는 살것다 했는데, 무엇을 자살을 해? 자살할 애기가 아니여."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서울시 마포구 신민당사 뒷마당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 김경숙의 죽음은 세상이 다 알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몰랐던 죽음이었다. 21살 그 여성노동자가 어떤 과정으로 죽음에 이르렀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경찰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가 없다고 말했다. 자살이라고 했다. 동맥을 그은 흔적이 손목에 남아있었으니 자살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겨우 고등학생이던 남동생과 광주에서 행상으로 살아가던 어머니가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들은 당국의 서슬에 놀라 저들이 말하는 '빨갱이 딸과 누나'에 대해 제대로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긴 여당 보다 국회의원 숫자가 많았던, 강력한 야당의 당사가 단 23분 만에 무차별 폭력으로 진압되는 세상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겠는가? 김경숙은 서둘러 화장되었고 고향 땅에 뿌려졌다. 그의 죽음은 세상이 다 알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지나갔다. 

그가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 중턱에 가묘나마 마련할 수 있었다. 그제야 어머니는 딸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살할 애기가 아니라고.

누나가 돈을 못 보내더라도 기다리지 마라

김경숙은 1958년 6월 5일 전라남도 광산에서 태어났다. 장녀였고, 밑으로 남동생 둘을 두었다. 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행상에 나섰고, 경숙은 집안 살림을 하며 두 동생을 돌봤다. 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다. 누군가는 어린 두 동생을 키워야했으니까. 

그러다가 뒤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두 동생 중 하나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열 살도 되기 전에 살림을 맡아 하고 동생을 키웠던 어린 소녀에게는 어떤 점에서는 짐을 벗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좀처럼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6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집 근처에 있던 누에고치 삶는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특히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자진해서 택한 길이었다. 그 후 2년 간 광주 근처 하청 봉제 공장을 전전하던 그는 ‘돈을 두 배나 더 벌 수 있다’는 육촌 언니의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청량리 등지에 있던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며 주로 봉제 미싱사로 일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가 다닐 수 있는 곳은 월급이 밀릴 정도로 영세한 곳이거나 아니면 운영이 어려워 폐업을 하는 회사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부쳐주는 돈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며 늘 마음을 졸였다. 

사랑하는 동생 준곤에게

누나가 일하는 공장이 앞으로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구나.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누나의 가슴이 어찌나 떨리고 다리까지 후들후들 떨리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분간 누나가 돈을 보내지 못하더라도 눈 빠지게 기다리지 말았으면 한다.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

그랬기에 1976년 8월 YH무역에 입사했을 때 경숙은 뛸 듯이 기뻤다. 큰 회사에 취직했으니 이제 회사 문 닫을 걱정은 접어두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7년 6월 10일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개설한 야간 과정 녹지중학에 1기로 입학하여 배움을 향한 갈증도 풀었다.

김경숙의 일기는 녹지중학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인 1978년 1월 1일 시작해서 그해 7월 28일까지는 비교적 꼬박꼬박 작성되었다. 이후 약 7개월가량 공백이 있었다가 1979년 2월 23일 ‘모처럼만에 적어보는 일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일기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는지 모두 여섯 번 정도 드문드문 쓰다가 1979년 6월4일, 세 줄, 그것도 쓰다만 듯 끊어진 형태로 남기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신민당사에서 발견된 것이 8월 11일이니 그는 그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일기 속에 나타난 김경숙은 일감이 줄어들어서 걱정이 많은 노동자였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야학으로 달려가는 성실한 학생이었고, 친구와 싸우고 나서 ‘인내심이 부족했던 나’를 반성 하는 착한 동료였다. 그리고 어느 설날, 친구 언니네 집에서 떡국을 끓여 먹으며 보냈던 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묘사한 외로운 젊은이였다. 그의 일기는 특별히 꾸미지도 특별히 세밀하지도 않은 담담한 일상의 기록이었지만, 그곳에는 인간 김경숙이 담겨있다.   

새해가 시작되는 새벽 0시, 경숙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작년에 이루지 못한 모든 일을, 올해는 보람찬 생활 속에, 주님의 은총아래 소망이 깃들길 간절히 기도했다.”고 일기의 첫 장에 적었다. 김경숙은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그가 다녔던 동일교회에는 야학이 있었고, 이 야학에서 배운 것과 녹지중학에서 배운 것은 그의 삶을 조금씩 바꿔갔다.

1978년 4월 28일, “현장에서 동료들이 사직하는 바람에 어수선하고 울적한 마음이었다. 그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을 길 없어 헛된 길을 생각하였으나 야학에 다니며 한없이 배우고 싶다"고 썼다. 그즈음 공장이 지방으로 이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많은 동료들이 사표를 썼다. 그러나 이것은 사업을 접어야 한다고 판단한 회사 경영진들이 ‘처치 곤란한’ 노동자들을 해고가 아닌 사직으로 처리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김경숙은 얼마 안 있어 회사의 속내를 알아챘고, 그것을 5월 2일의 일기에 적었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 임금을 착취시키기[착취하기] 위해 휴가를 주며 자진 사태[사퇴]를 (종용)할 때 내 마음은 아팠다.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토론을 하며 싸워야 한다. 개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뭉쳐서 인원 감소를 막고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 (공장)이전 관계로 (어수선 했던) 마음의 안전[안정]을 오늘의 이 시간을 이용하여 찾았다. ‘본 공장을 돌려라 고용 완전 찾자.’ 단결. 권리. 뭉침. 싸움. 비평.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기록할 수 없었던 일

일기가 없던 7개월 동안의 공백.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적어 놓은 지 두 어 달이 지나고 나서부터 그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노조 대의원 활동이 너무나 바빠졌을 수도 있고, 폐업과 폐업 철회를 반복하는 회사와 협상하느라 일기를 쓸 틈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기간 동안에는 일기에도 쓰지 말아야 할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일기를 중단했고, 이후 다시 쓰기 시작한 일기는 “혀끝으로만 움직일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비춰봐야 한다.”(1979년 3월1일) “실천에 명확히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며 왔다.”(1979년 3월3일)라는 고백에서 보듯 비장하고 단단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 많다. 그러다 4월 22일에서 25일까지 3일 동안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보고 온 이야기를 썼다. 그 방문은 3년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아주 자세하게 만남의 기쁨을 적었다. 그리고는 “몰라보게 성장한 사랑스런 동생의 모습은 나의 눈을 놀라게 했다”면서 “성숙해져버린 몸과 키, 그리고 사상과 이념. 어느 누가 이토록 우리를 성장시켰을까. 우리는 웃으면서 몇날 며칠을 즐거운 우리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동생 준곤에게는 마지막 누나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서울강남시립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누나는 그때의 누나가 아니었다. 3번의 번복 끝에 ‘자살’이라고 발표한 경찰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1970년 전태일에서 시작한 7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렇게 1979년 김경숙으로 마감했다. 그리고 29년이 지나서야 국가는 그의 죽음을 ‘경찰의 과잉 진압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확인해줬다. 2008년 3월「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의 부검 기록을 재검토하여 ‘주검에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고,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다. 후두정부에서는 모서리 진 물체로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 고 발표하여 스스로 동맥을 끊은 자살이 아니라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 

어머니의 말대로 그는 자살할 애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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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