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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노동, 화이팅 - 해태제과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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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일요일 18시간, 일주일에 72시간에서 90시간을 오가는 지옥 같은 노동시간이었다.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침 8시에 출근한 노동자들부터 8시간 근무 후인 오후 4시에 퇴근을 감행한다.

1979년 8월 10일, 남자 기사들의 엄청난 폭력을 뚫고 퇴근한 몇 명의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한 집에 모여 대의원 김순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휴, 속이 쓰린 건지 배가 고픈 건지 알 수가 없네. 우리 부침개라도 만들어 먹을까?”

“위장병이 아주 고질이 됐구나. 밀가루 그거 속병에 안 좋아. 죽이라도 끓여 줘?”

“무슨 고상하게시리 죽 타령이야? 김치 좀 썰어 넣고 기름에 지글지글 부쳐 먹자고.”

“너, 위장병에, 무좀에 온갖 직업병은 다 갖고 있으면서 그렇게 아무거나 먹어 댈 거야?”

“됐어! 기계 청소하느라 손가락 세 개나 잘려먹은 너 보다는 내가 낫지. 내가 만들어 줄게.”

“다들 편히 앉아 계셔들. 위장병에, 손가락 병신에 도무지 멀쩡한 인간이 없네. 내가 할게, 내가.”

“우하하하! 너 지금 코맹맹이 소리로 뭐라는 거야? 라인 이동 되고나서 밀가루 작업 때문에 대번에 축농증 걸렸다며?”

“에그, 다 비켜! 먹고 싶은 자가 만들어 먹을 테니. 도대체가 해태제과 근무 몇 년 만에 환자 아닌 인간이 없네.”

그때 대의원대회가 끝나고 나서 바로 가족들에게 끌려갔던 이숙자가 울면서 들어왔다. 

“어? 숙자야! 너 어떻게 빠져나왔어? 아버지랑 사촌형부가 와서 끌고 갔다며?”

“엉엉엉엉, 어떡해. 속상해 죽겠어.”

“울지 말고 말해봐. 너네 사촌형부가 지방에서 해태센터를 한다고? 또 뭐라고 협박하디?”

“뭐, 나 때문에 문 닫게 생겼대. 죽일 년 살일 년 별 쌍소리 다해가며 길길이 뛰고, 울 아버지는 한 숨만 쉬고......”

“지금 그런 협박당하는 사람이 너 뿐만이 아니야, 나도 소개해준 아저씨가 쫒아 와서 내 멱살 잡고 별 쌍소리 다하고 난리 났었잖아.”

“휴......울 아버지 안 그래도 혈압이 안 좋으신데 쓰러지시기 일보직전이라 일단 휴가라도 내서 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참, 회사 놈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는데 아무래도 순례가 어딘가에 잡혀있는 거 같던데?”

“뭐라고? 안 그래도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는데, 얘들아! 어서 가보자”

김순례를 포함한 껌부의 50여명은 8시간 근무 후인 4시 반경 퇴근하려 했지만 밖으로 문이 잠겨있어서 나가지 못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기사들이 몰려와 김순례를 끌어내 콘크리트 바닥에 패대기를 쳤고 머리를 다친 김순례는 실신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팔다리가 뒤틀린 채 실신한 김고만과 함께 자재창고에 방치된 채 쓰러져있었다. 오후 6시경 친구들에 의해 발견된 김순례는 그날 밤 영등포에 있는 기독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한때 중환자실로 옮겨지기도 했다. 

어용노동조합 위원장까지 회사와 합세하여 조합원들을 탄압하는 상황 속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현장 문을 잠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다”, “씹어 먹겠다”, “밟아죽이겠다”는 등의 상스러운 욕을 퍼붓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예사였다. 무엇보다 입사 때 추천한 사람과 가족까지 동원한 퇴사 압력은 여성 노동자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껌부의 정명숙은 해태제과에 다니는 외삼촌의 지인이 소개하여 입사를 했었다. 1979년 9월 5일 그는 야간 출근조여서 저녁 7시에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탈의실 입구에서 노조 부녀부장 홍영자가 다가와 정명숙의 팔을 붙잡았다. 

“야, 나 좀 보자.”

“이거 놔요!”

정명숙이 팔을 뿌리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의 외삼촌이 달려들더니 정명숙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리지도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코피로 범벅이 되어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는 정명숙의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야!”

어느샌가 외숙모까지 나타나 합세해 폭력을 휘둘렀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금순과 김복실이 달려들어 말리려 하자 경비가 막아섰다.

“너는 뭐야? 네가 뭔데 말리는 거야? 이름이 뭐야?”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차라리 죽자. 우리도 한 사람이 죽어야 8시간 문제가 해결돼. 죽자고, 죽어.”

막다른 골목에서 외치는 피맺힌 절규였다.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노조가 공권력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김경숙 열사가 죽임을 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렇게 간교한 회사의 사주에 넘어간 가족들이 나타나 무조건 고향으로 끌고 가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캬라멜부의 이광순은 좀 나은 편이었다. 어느 날 회사의 무지몽매한 탄압에 무거워진 다리를 끌고 귀가한 이광순은 책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편지를 발견하고 눈물을 흘린다. 

“광순아, 읽어 봐라.

어젯밤에 최과장하고 민반장하고 와서 나하고 약 한 시간 대화를 나누고 갔다.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손도 안 대고 그대로 책상 위에 두었다. 너하고 타협한 다음 해결을 보기 위하여. 그런데 나는 그네들한테 굴하지 않고 꿋꿋이 대답을 하였다 실망하지 말고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고 조직된 일을 YH사건처럼 끝장을 보도록 하여라. 최과장은 내 말을 듣고 대단히 실망을 한 채 돌아갔다. 몸조심 하거라.”(순점순, 8시간 노동을 위하여, 127쪽)

회사가 가족들을 동원하여 방해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동안 가족들과 회사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결과였다. 

1979년 8월 25일 해태 식품뉴스지에는 해태가 34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1천억원의 판매고를 올리는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45년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에서 시작해 종업원 3000여명의 굴지의 제과업체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피땀을 필요로 했을까? 하지만 불황이라고 사기 치며 여전히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기만 했고, 7, 8월 동안에는 회사의 폭력과 간교한 술책에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쓰고 나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해태노동자들은 회사의 잔인한 방해공작에 굴하지 않고 언론과 사회 각계에 알리는 일에 박차를 가하며 9월부터 불매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대재벌 해태제과는 법을 안 지키고 있습니다.”

“사지도 말고 먹지도 맙시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맙시다!”

마침내 1980년 2월 29일 조회시간, 관리자들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회사의 결정 사항을 전달했다. “내년 3월 2일 월요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한다.” 노조와 회사가 한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에 맞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대의원 5명과 평조합원들의 처절한 투쟁이 일궈낸 값진 결과였다. 해태노동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후 10.26과 계엄령을 거치며 8시간노동제와 노조민주화운동은 힘겨운 고비를 넘겨야 했지만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의지와 단결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1980년 4월 11일 언론은 일제히 ‘12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제과업체 근로자가 하루 8시간 근무를 하게 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뿌렸다. 이렇게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은 역사에 기록되며 한국의 노동운동을 장식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투쟁의 결과는 해태제과만이 아니라 전 식품업계에도 확대 실시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8시간노동제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이후로도 노조 민주화 문제와 폭력 사원 처벌 문제 등 노동자 처우 개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단 없는 투쟁을 이어나갔다.

1953년에 시작된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 확정을 거쳐, 2004년 7월 ‘하루 8시간, 주 40시간제’로 정착이 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고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 10명 중 5명이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고,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8시간노동제의 사각지대에서 부당한 처우로 고통 받고 있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