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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들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민주, 평화, 민생은 현대사의 거목이자 반독재 민주화운동사의 든든한 주춧돌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평생의 화두였다. 1번의 사형선고와 3번의 살해위협과 6년 동안의 투옥과 10년의 망명과 55차례의 가택연금 끝에 우리 헌정사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하여 한국민주주의의 절차적 완성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으니 그를 인간승리의 전형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걸었던 험난한 발자취의 일부인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살펴보며, 영욕의 길을 걸어 마침내 천상으로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이른바 신군부는 ‘시국수습’이라는 명분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함께 국회해산, 비상대책 기구설치, 예비검속 대상자, 권력형 부정부패척결 대상자,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 선정 등 헌법말살행위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민주진영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민주화를 추진하고자 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계엄해제와 민주화일정 제시를 요구하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이 5월 15일 발표되는 등 민주화의 요구가 정점에 달하던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두환 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확대 조치 직전 계엄사는 이미 김대중 등 37명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김종필 등 9명을 권력을 통한 부정축재혐의로 체포하고, 18일 새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으로 국회를 점거해 사실상의 헌정중단 사태인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계엄법․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을 근거로 김대중을 비롯한 박형규, 백낙청, 송건호, 이효재, 장을병, 유인호, 임재경, 문익환, 안병무, 한완상, 이문영, 송기원, 고은(고은태), 한승헌, 이호철, 이해동, 서남동, 조성우 등 37명이 연루된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12·12쿠데타와 5·18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집권 초기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고 위기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상징적 정치인이고 광주항쟁의 정신적 구심점인 김대중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동시에 김대중과 국민연합이 중심이 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 계획을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신군부는 이 사건에 김대중의 측근 이외 재야 및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을 연루시킴으로써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의 와해를 기도하고자 계엄사 합수부의 무자비한 고문을 통해 사건을 철저하게 조작하였지만, 김대중 체포 직후 미국 행정부조차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등 대내외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신군부의 통제 하에 있던 1심 군사재판은 1980년 9월 17일 짜여진 각본에 따라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의 요지는 “소위 국민연합을 전위세력으로 하여 대학의 복학생들을 행동대원으로 포섭, 학원소요사태를 폭력화하고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하려 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신군부는 그 구체적인 사례로 복직 교수와 복학생을 조종하여 학원사태의 과열과 악화를 꾀했으며,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00만 원을 주어 계엄 해제와 정치일정 단축 등을 주장케 하여, 사실상 광주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또 광주사태 당시 무기 반납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사실 등을 열거하였다. 광주항쟁 이전에 이미 검거된 상태에서 광주항쟁을 배후조종하고, ‘제2의 광주사태’를 준비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이외에도 김대중이 “재일 반국가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일본에서의 활동을 범죄시한 이러한 공소내용으로 일본정부와 외교마찰을 초래하기도 했으며, 일본 독일 미국 등지의 해외동포들이 김대중 구출운동 등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다각적으로 연대하는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에 대해 사건 발생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같은 날 전두환은 국무회의를 통해 무기로 감형시켰다. 1982년 3월 2일 무기에서 다시 20년으로 감형된 김대중은 같은 해 12월 16일 복역중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12월 23일  2년 7개월의 옥고 끝에 형 집행정지로 미국으로 강제 망명을 떠났다. 이 사건은 기나긴 시간이 흐른 후인 2004년 1월 29일 재심에서 1980년 광주 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외국환 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는 각각 면소 판결됨으로써 25년 만에 완전히 종료되었다. 

사료관에는 김대중 관련 사료가 2,500여 건이 수집되어 있는데 이중 200여 건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사료다. 상고이유서와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의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공판기록>은 이 사건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입장과 피해자 김대중의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다. 한편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작성한 호소문과 송건호씨의 아들 송준용의 탄원서 등 피해자 뿐 아니라, 터무니없이 진행되는 재판과정과 결과를 지켜본 가족들이 낸 성명서가 있다. 청주교소도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채 독서 중인 수인번호 9의 모습도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