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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사건-“산업화의 뒤안길, 도시빈민들의 처절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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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을 떠나온 유민들

언제나 먼저 소식을 알리는 것은 동네 아이들이었다.

“온다!”

“철거반이 온다!”

남쪽으로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포구 산등성이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은 무허가 빈민촌이었다. 아이들 말대로 언덕 아래 트럭에서 작업복에 완장을 찬 남자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손마다 커다란 해머나 곡괭이를 들었다.

“빨리 살림살이 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양지바른 공터에서 윷놀이를 하던 남자들, 컴컴한 집안에서 봉지 붙이기니 인형 실밥 따기 같은 헐한 부업을 하던 아낙들 할 것 없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개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쌓고 루핑이라 불리는 검은 기름종이를 씌운 후 돌을 얹어 날아가지 않게 만든 집들이었다. 내부라고는 부엌과 방 한 칸뿐, 창문은커녕 온돌 장치도 제대로 갖춘 집이 드물었다. 살림살이라야 이불이며 냄비, 밥그릇 따위가 전부였으나 그나마 굶주리는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이들에게 남은 전 재산이었다.

값싼 블록조차 구하지 못해 사막의 유목민처럼 검은 천막을 치고 살던 집들은 재빨리 지지대를 뽑아 천막을 바닥에 깔아 버렸다. 영리한 사람들은 철거에 대비해 블록 사이에 모르타르를 바르지 않고 쌓기만 했다가 철거반이 온다면 미리 스스로 블록을 해체해 바닥에 깔아버렸다.

사람들이 알량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위로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서울시에서 나온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집들을 때려 부쉈으나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다. 살벌한 군사독재 치하였다. 공권력 집행자들은 자신에게 항거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길 한복판에서 개처럼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고, 어떻게 지은 집인데 부수면 올 겨울을 어떻게 살란 말이오....”

곳곳에서 아낙네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지만, 어느 남자도 완장 찬 철거반에게 대항하지 못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몇 시간에 걸친 철거작업 끝에 철거반 트럭이 먼지를 내며 사라진 산언덕은 폭탄을 맞은 듯 황량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건물의 잔해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며 뭔가 쓸모가 있는 게 없을까 찾아다녔으나 본래 빈한한 살림살이에 남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미리 블록을 바닥에 깔았던 이들은 다시 블록을 쌓기 시작하고, 천막도 치기 시작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집을 다시 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망연자실 앉아있기만 했다. 이제 그들은 또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2. 신천지를 찾아서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산업화는 수많은 농민들을 도시로 이주하게 했다. 대부분 소작인이나 빈농으로 살다 올라온 이들에게는 서울의 집은커녕 땅 한 평 살 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아동, 상계동, 공덕동, 중계동, 구로동, 봉천동, 시흥동 등 서울 변두리의 산등성이에 찾아들어 무허가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끊임없이 이들 무허가 건물들을 철거했으나 한곳에서 철거당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새로 짓는 자리이동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마침내 서울시는 1968년부터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토지를 사들여 서울시 철거민들을 위한 신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1970년 350만 평에 35만 인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이른바 광주대단지였다.

“한 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원에 분양한단다.”

“입주하고 3년 뒤부터 3년간 분할상환하면 된대.”

“공장을 세워 일자리도 만들어 준다더라.”

소문은 도시빈민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희망에 들뜬 빈민들은 너도 나도 신청서를 냈다. 빈민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철거민들은 이불보따리와 식기도구들을 싸들고 서울시가 제공한 트럭에 실려 낯선 땅으로 실려 갔다. 

아직 도로포장도 되지 않은 먼 길을 달려간 이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러나 삭막하기만 했다. 남한산성 언저리 산들은 가파른 경사지로 이뤄져 있었다. 여기에 나무만 베어 놓았을 뿐, 도로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비가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길로 변했고 눈이 오면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빙판이 되었다. 

“이게 뭐야?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망연자실 서있는 이들에게 서울시는 가구 당 하나씩 텐트를 던져준 게 끝이었다. 14만 명에 이르는 이주민들이 황량한 황무지에 버려진 것이었다. 

약속했던 공장도 지어지지 않았다. 막노동이나 지게꾼이라도 하려고 서울로 가려면 을지로 6가까지 1시간 반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왕복 70원이나 되는 버스비를 내고나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가난의 속살은 끔찍했다. 겨울이면 난방시설도 갖추지 못한 채 바람만 겨우 막는 천막마다 굶주린 아이들과 실업자들이 대낮에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추위에 떨었고 여름이면 그늘 하나 없는 황무지 위에 겨우 햇볕만 가린 천막 안에서 파리, 모기를 물리칠 힘도 없이 쓰러져 있는 참상이 벌어졌다. 노천 변소의 오물은 사방으로 넘쳐 천막촌 전체가 항상 역겨운 악취에 덮여 있었고 썩어가는 쓰레기가 곳곳에 널려 전염병을 불렀다. 전쟁 중의 피난민도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군사정부의 이주정책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오로지 1971년 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을 겨냥한 선심행정일 뿐이었다. 군사정권은 양대 선거가 끝나자마자 본색을 드러낸다.

“뭐? 땅 한 평에 16,000원?”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막마다 발부된 통지서를 든 주민들이 흥분해서 몰려나왔다.

“평당 400원에 산 땅을 우리에게 40배로 팔아먹겠다는 거야?”

도로도 상하수도 시설도 하지 않고 껍질만 벗겨낸 맨 땅을 수십 배로 사라는 통지서는 주민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정부는 7월 말까지 일시불로 땅값을 내라고 했다. 애초에 사람들을 싣고 올 때 제시했던 ‘평당 2천 원, 3년 거치 3년 상환’의 조건과는 전혀 달랐다. 만약 기한 안에 납부하지 않으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가구당 배당된 땅은 겨우 20평이지만 땅의 위치에 따라서 적게는 20만원에서 많게는 36만원이었다. 말단 공무원 월급이 만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집이 없어 이 비참한 언덕까지 흘러들어온 빈민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거액이었다. 

“그 돈 있으면 서울에 샀지,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겠어?”

“도둑놈들! 우리 같은 서민에게 피를 빨아먹으려고!”

분노는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주민들은 7월 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평당 가격을 1천5백 원 이하로 내릴 것, 10년간 분할상환하게 할 것, 영세민 취로사업을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그 누구도 대책위원회의 요구에 답변을 주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감옥 아니면 벌금에 처해질 처지였다.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해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3. 최후 결단의 날

화요일인 1971년 8월 10일 오전 10시, 성남출장소 뒷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몽둥이와 삽, 피켓 등을 들었고 가슴에는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하나 같이 검고 메마른 얼굴에 분노를 담은 사람들은 서울시장과의 대화를 요구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시간이 가면서 숫자는 5만 명을 넘어섰다. 구름이 끼어 있었으나 공기는 숨 막히게 무더웠다. 주민들은 땀에 젖은 얼굴로 외쳐댔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 토지 불하가격 내려달라!”

“백 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라!”

먹장구름에 덮인 하늘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함성은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했다. 마침내 11시 45분 경, 3백여 명의 군중이 성남출장소로 달려갔다. 성남출장소에서는 연기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와! 다 때려 부셔라!”

불길을 보며 흥분한 수만 명의 주민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성남출장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출장소 옆에 서있던 검정색 관용 지프를 뒤집어 불태우고 공무용 버스와 트럭을 탈취해 광주대단지 전역을 누비기 시작했다. 광주출장소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소방차와 경찰이 출동했으나 시위대에 가로막혀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정오가 넘어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사람들은 흩어질 줄을 몰랐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비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결판내기를 원했다. 두 시가 되면서 경찰기동대 7백 명이 나타나자 주민들은 맹렬히 돌을 던져 이들의 접근을 막았다. 광주경찰서 성남지서와 남문주유소가 불길에 휩싸였고 경찰차량들도 뒤집혀 불타올랐다. 곳곳에서 경찰과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폭동에 가까운 혼란의 와중에 운 나쁜 트럭도 있었다. 참외를 가득 싣고 가던 트럭 한 대가 군중들에게 걸린 것이다.

“참외다! 차 세워!”

아침부터, 아니면 그 전날 또 전날부터 굶은 채 진흙탕을 누비고 다니던 군중들은 일제히 외치며 트럭에 달려들었다. 진흙탕 속에 샛노란 참외가 쏟아져 내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트럭 분량의 참외는 순식간에 한 개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굶주린 사람들은 진흙범벅이 된 참외를 정신없이 먹어댔다.

마침내 오후 5시,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전면 수용한다고 발표하면서 6시간동안의 시위는 일단락되었다. 이 와중에 주민과 경찰 1백여 명이 부상하고 주민 22명은 끝내 구속되었지만 서울시의 약속은 이행되었다. 나아가 광주대단지는 성남시로 승격되고 공장설립과 상하수도 건설 등의 추가조치도 실시됨으로서 주민들의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