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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납치사건-유신체제를 뒤흔든 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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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납치

1972년 가을,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 있었다. 그는 비상계엄령 하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된 소식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장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는 반민주적인 조치이다. 나는 민주적 자유를 원하는 조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기필코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저지할 것이다.”


김대중은 귀국을 미룬 채 일본에 머물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잇따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해외 언론에 한국의 독재 상황을 긴급히 알렸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한국의 폭압적인 정치 현실을 폭로했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유신반대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 7월, 일본으로 돌아온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 지부 결성에 힘을 쏟았다. 한국 정보부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7월 18일, 김대중은 계간 《세계》지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 대담을 가졌다. 김대중은 이 대담에서 박정희 독재체제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야스에 편집장이 “선생님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캄캄한 밤이라도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반드시 다시 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이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나에게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국민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양심의 근원이다. 나는 이런 신념하에 살고 있다.”

김대중은 도쿄의 하라다 맨션에 머물고 있었다. 그 맨션은 야마노테센(山手線)의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역에서 도보로 3분 정도 걸리는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12층 건물의 1층에는 도시은행과 찻집이 있었다. 그 주상복합 건물의 11층 7호실이 김대중의 사무실 겸 주거 공간이었다. 스무 평가량 되는 1107호실 입구에는 ‘한국민주제도 통일문제연구소 도쿄사무소’ 라는 조그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라다 맨션 주변에는 낯선 사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김대중을 감시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여름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습기를 밴 공기는 무겁고 눅눅했다. 그날 오전, 김대중은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1호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민주통일당의 양일동 총재, 김경인 의원과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김대중이 방에서 막 나올 때,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복도를 막아섰다. 그들은 다짜고짜 김대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구냐? 당신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들은 김대중의 입을 틀어막고는 옆방 객실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다. 국제 문제니까 조용히 해라. 곧 끝날 테니 기다려라.”
납치범은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김대중의 코에 대고 눌렀다. 김대중은 마취되었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차 뒷좌석에 태운 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의원님이 왜 이렇게 안 내려오시지? 이상하다. 한번 올라가 보세.”  호텔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객실로 황급히 뛰어 올라갔다. 텅 빈 방에는 권총 탄창과 종이 봉지, 배낭과 로프, 휴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비서들은 옆방에서 공포에 질린 채 감금돼 있던 양 총재와 김 의원을 발견하고는 풀어주었다. 두 의원은 곧장 일본 경찰에 신고했다.  “긴급 뉴스 속보입니다. 한국의 김대중 의원이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NHK 방송이 김대중납사건을 매 시간마다 신속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마자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괴한들이 모는 차는 바닷가에 도착한 뒤 멈춰 섰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결박한 채 부둣가로 끌고 갔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의 머리 위로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뒤 모터보트에 태웠다.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은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성호를 그었다. 그때, 누군가가 복부를 걷어찼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보트가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커다란 배에 옮겨 태웠다. 그들은 김대중의 온몸을 꽁꽁 묶은 뒤 무거운 추를 매달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김대중의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보자기를 뒤집어쓴 까닭에 모든 것이 캄캄했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잘 보였다. 그는 예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예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저에게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눈앞에서 강렬한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배가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하늘 어딘가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기가 나타났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배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바람에 김대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배의 속도가 늦춰질 무렵 누군가가 속삭였다. “김대중 선생님 맞지예? 지는 1971년 대선 때 부산에서 선생님께 투표를 했습니더. 선생님은 이제 살았습니데이.” 경상도 말씨였지만 친절한 어감이었다. 그 남자가 머리에 둘렀던 붕대를 잠깐 풀어주었다. 김대중은 재빨리 바다와 배 이곳저곳을 휘둘러보았다. 납치범들은 남쪽 바닷가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들은 김대중을 조그마한 건물 2층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군복 바지를 입은 남자가 부동자세로 누군가에게 보고를 했다.


그날 오후,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차에 태운 채 고속도로를 한참 달렸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어느 골목길에 내려주고는 붕대를 풀어주었다. 달빛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동교동 뒷골목이었다. 사건 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경이었다. 납치된 지 엿새째 되던 날, 사지에서 돌아온 김대중은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2. 김대중의 귀환 이후 휘몰아친 유신반대운동

박 정권은 김대중을 다음날부터 집에 가두었다. 기약 없는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동교동 집을 빙 둘러 경찰 병력이 에워쌌다. 골목 어귀에는 여러 개의 감시초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외부인의 동교동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가족들의 전화사용도 금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셋째 아들 홍걸이가 등교할 때도 감시 요원들이 따라붙어 미행했다.


8월 15일, 일본에서는 김대중이 부재중이었지만 예정대로 한민통 일본 지부가 결성되었다.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이 집회는 ‘김대중 씨 사건 진상 규탄회의’로 바뀌었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3천여 명의 참석자들은 “박 독재 타도, 민주회복!”을 드높이 외쳤다. 국회에서는 김대중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유일하게 정일형 박사가 유신정권에 대항했다. 그는 “머리 위에 태양이 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 사건도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박 정권을 질타했다.

이 무렵 국내의 민주인사들은 김대중의 연금을 풀어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저명한 정치인들도 박 정권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박 정권은 마이동풍이었다. 감시초소는 오히려 일곱 군데로 늘어났고, 기동대원들은 3천 명으로 불어났다. 박 정권은 무력을 동원해 동교동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은 국민들의 유신반대운동에 불을 붙였다. 민주주의의 빙하기가 지속되던 19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정적을 현해탄에 영원히 수장시키려다 도리어 거대한 저항운동에 부딪혔다. 당국의 극심한 탄압 속에 한동안 주춤했던 대학생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국은 강경조치로 일관해 180명 연행자 가운데 20명을 구속, 22명을 제적하고 18명을 자퇴시켰으며 56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그러자 유신반대투쟁은 서울대의 각 단과대로 번져나갔다. 전국의 각 대학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자 이 시위에 고등학생들까지 동참했다. 민주화운동은 서울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다.


1973년 12월 24일, 윤보선 전 대통령, 장준하 등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등 30여 명이 공화당 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며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민주 회복을 위한 1백만인 개헌 청원 운동’이었다.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10일 만에 서명 참가자가 30만 명을 넘어섰다. 박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급류를 탔다.

1974년 1월 8일, 박 정권은 긴급조치 1, 2호를 잇따라 발동했다. 개헌 운동을 무력으로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에 따라 재야인사와 종교인, 정치인, 학생을 비롯한 백만인개헌청원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장준하, 백기완 등 주요 인사들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학순 주교는 7월 15일과 23일에 유신반대 성명과 양심선언을 발표해 반유신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의 폭력 앞에 침묵할 때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발표한 양심선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중앙정보부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더욱 와해시키기 위해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이 존재한다는 흑색선전으로 공포정치를 펴나갔다. 1975년 4월 9일, 사법 당국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 사건은 세간을 거대한 충격 속에 빠뜨렸다. 국제법학자회는 이 사형집행을 ‘사법살인’이라고 칭하고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여 박 정권의 비민주적 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유신반대운동은 살벌한 공안정국을 뚫고 세찬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 대학가에서는 “유신독재 퇴진”, “유신헌법 개정”, “중앙정보부 해체” 등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여나갔다. 재야인사와 야당 지도자, 종교계 인사들은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유신반대운동을 벌여나갔다.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체제가 막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최악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김대중납치사건은 얼어붙은 산하를 일깨우는 새벽닭의 울음소리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유신체제를 뒤흔든 뇌관으로 작용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